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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보우가 「선교일체」 일으킨 수도산 봉은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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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빛이 꺼져가던 조선조의 불교에 다시 기름을 붓고 불을 댕겨 불국의 찬연한 광채를 이 땅에 남기고 순교한 스님이 있었다. 허응당 보우의 저 눈부신 법력이 없었던들 누가 허물어진 선교우종의 기둥을 다시 세웠겠으며 선교일체의 법어를 누가 터뜨릴 수 있었으랴.
보우의 불교 중흥, 보우의 사자 후 같은 설법을 들으러 봉은사를 찾아간다. 20여년 전만 해도 뚝섬에서 나룻배를 타고 건너 풀 섶을 헤치고 걸어가야 했던 수도산 봉은사는 서울이 아닌 경기도 광주에 속해 있었다.
지금은 영동대교를 건너면 턱밑에서 만나게 뫼는 이 절이 바로 보우에 의해 조선 불교를 다시 일으킨 대본 산이요, 보우가 홀연히 나타나 설법의 목탁을 울리고 불교 중흥의 대 역사를 하다 순교하기까지 17년의 발자취가 이 봉은사에 연등으로 타고 있는 것이다.
보우의 출생 연대와 그 배경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중종 4년 (1509년)경에 태어나 15세 때 금강산 마가연암에 들어가 머리를 깎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무렵은 배불숭유가 극성을 부려 사찰은 황폐해지고 승려들은 뿔뿔이 흩어질 때였다.
조선조에 들어와 억불정책으로 불교가 쇠퇴 일로에 접어들었는가 세조의 호불로 잠시 살아났다가 성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본격적으로 박해가 시작되었다. 성종 6년 (1475년)에는 서울 안팎의 절 26채를 헐었고 성종 8년에는 도첩 (중의 허가증)의 법을 만들어 도첩이 없는 중은 부역이나 군대로 보내는 등 절에서 쫓아내고 23년에는 아예 도첩제까지 없애게 된다.
이러한 불교 말살 정책은 연산군에 와서는 더욱 심해져 연산군 9년에는 중의 성안 출입을 못하게 했다. 10년에는 선종의 종무소인 흥천사와 교종의 종무소인 흥덕사, 그리고 세조가 세운 대원각사 마저 폐쇄됐으며 비구니들을 노비로 삼기까지 하였다.
중종 2년에는 그동안 시행치 않던 승과를 폐지하는 등 척불의 기운은 꺾일 줄 몰랐으며 중종 7년에는 흥천사와 흥덕사의 범종과 경주의 불상 등을 녹여 병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렇듯 불교가 탄압 받고 말살되던 시대적 환경에서 보우가 입산한 것은 현실을 떠나서 학문과 참선에 수도 정진하는데 뜻을 두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가위 선경이라 할 수 있는 금강산의 구름과 바람, 새소리와 물소리에 마음을 씻으며 대장경을 읽고 유학의 경서들도 읽으며 시를 짓고자 진리에 눈을 뜨고 있었다.
금강산에 올라 참선한지 여섯 해
말 같고 원숭이 같던 마음 고삐가 풀렸구나
수놓은 옷 입고 밤길을 가느냐고 웃을 테지만
바랑 지고 숲을 헤치며 벼랑길을 내려간다.
(육년좌단금강정 의마심원자재순 의수야행인소소 횡담즐표하린순)
이 시에서 보듯이 보우는 금강산에서 글을 읽다가 6년만에 세상 구경을 하러 내려온다. 그러나 산 아래에서는 그가 발 붙일 곳이 없었다. 사찰들이 수난을 당하고 있어 그는 다시 금강산으로 돌아가고 만다. 그는 다시 참선을 하며 시로 마음을 달래기도 한다.
나 홀로 금강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올라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굽어보니 마음이 맑아지는구나
가을이 깊으니 골짜기는 푸른 유리를 깔고
서리가 내리니 산들은 비단에 수를 놓았구나
돌길은 단풍 아래 멀리 빗겨있고
암자는 흰 구름 속에 희미하구나
신선이 된 듯 날이 저물어도 돌아올 줄 모르는데
어디선가 숲을 뚫고 들려오는 저녁 종소리
「망고봉에 올라 (등망고봉)」라는 이 시를 보면 그는 선승이기 이전에 뛰어난 시인이었음을 엿보게 하고, 그의 글공부가 어디에 와 있는 가도 짐작케 한다. 그는 이미 산에서는 물론 산 아래에까지 높은 학덕과 달관의 설법으로 널려 이름이 알려지고 있었다.
중종 38년 (1543년) 그는 금강산에서 대수육재를 올렸는데 불교가 억압받던 시대임에도 그의 설법을 듣기 위해 전국에서 구름같이 모여들었다고 하며 그것으로 큰 재화를 얻었다고 한다. 그는 안변 석왕사 근처의 은선암에서 한 여름을 난 일이 있는데 이때 함흥감사 정만종을 알게 되어 시를 주고받으며 남다른 교분을 맺게 된다.
유교와 불교 비록 나뉘었어도
그 길은 다르지 않다
예부터 스님은 이름난 선비와 친구였네
정만종은 놀라운 시구를 끝없이 내놓고
둥글고 빛나기는 항상 구름이 비치는 것 같았네.
보우가 정만종에게 화답 한이 시에서도 두 사람의 시로 맺은 우정이 배어 나오거니와 후일 그가 불교중흥의 전면에 나서게 된 것도 정만종의 천거 때문이라고 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명종3년(1548년)그는 전라도로 가던 길에 병을 얻어 경기도 양주에 있는 천보산 회암사의 차안당에서 눕게된다. 그해 12월 병을 회복했을 때 명곡조사가 봉은사의 주지직을 물러나며 그에게 맡긴다. 이로부터 보우의 한 시대가 시작되면서 봉은사도 선종의 대본산으로 솟아오른다.
중종의 뒤를 이은 큰아들 인종이 재위 1년만에 승하하고 열두살 명종이 왕위에 오르자 중종의 왕후인 문정대비의 수렴청정이 시작된다. 문정대비는 평소 불심이 깊었던 터라 불교의 회복을 기원했고 여기에 적임자로 보우가 떠오르게된다.
보우가 봉은사 주지로 부임한 두해 뒤인 명종5년(1550년) 12월 문정대비는 보우에게 선교우종을 부활시키는 임무를 부여한다. 문정대비로서도 윤원형등 세도 있는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렵사리 내린 결정이었다. 보우는 한밤중에 태양을 만난 것 같은 황홀한 감격에 몸을 떨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늘이 연산군으로 하여 불교에 화를 끼쳐
부처의 바다에 물이 마른지 몇 십년인가
햇빛 크게 밝아 깊고 먼 곳까지 밝히니
이 빛줄기 기필코 저승까지 비치리라
그는 이렇게 당시의 심경을 시로 읊었다.
봉은사는 선종의 본찰이 되고 광릉에 있는 봉선사는 교종의 본찰이 되니 이 양종이 부활하기는 54년만의 일이었다.
다음해 보우는 판선종사도대선사 봉은사 주지로 특명을 받게 되고 판교종사도대사 봉선사 주지는 수진이 임명받는다. 그러나 이 우종의 통할은 모두 보우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승과도 다시 시행하여 명종5년 서산대사 휴정이 이 봉은사의 승과평에서 장원급제하여 보우의 뒤를 이어 선교우종 판사에 오르게 되고 명종 16년 (1561년)에는 사명당 유정이승과에 급제하는 등 조선조의 법 맥이 보우에 의해 여기 봉은사에서 융성하기 시작한다.
보우는 명종 10년 봉은사 주지를 내놓고 춘천 청평사 주지로 갈 때 그 자리를 휴정이 받았는데 휴정은 『봉은사기』에서 「1만 솥에 밥을 지어 아침에 먹고 백섬의 쌀로 열흘을 산다」고 했으니 불교의 되살아남이 어떠했고 봉은사의 법회가 어떠했는가를 미루어 알게 한다.
문정대비의 발원으로 청평사 중창을 마친 보우는 명종 15년 봉은사 주지로 다시 복귀한다. 그가 선종과 교종을 일으켜 세우면서 선교일체의 사상을 펼쳤는데 그의 선시에서도 역력히 드러나고 있다.
선은 곧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는 곧 부처님의 말씀이라
마음과 말씀이 다르지 않을 진대
선과 교가 어찌 둘이겠는가(선시제불심 교시제불어 심구심불위 선교가회이)
다시 봉은사로 돌아온 보우는 문정대비와 뜻이 맞아 경기도 고양에 있는 중종의 묘인 정능을 봉은사에서 가까운 성종의 묘인 선능으로 옮기는 일을 성사시킨다. 봉은사는 성종·중종 두 임금의 능을 모시는 향화사로 궁중과 밀접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천능과 봉은사를 중창하는 불사는 불교를 반대하는 유림들의 비난과 수해 인력동원 등으로 백성들의 원성을사기에 족했다. 거기에다 보우는 명종 20년4월5일 양주 회암사를 중수하고 무차 대회를 열어 보우 생애의 절정을 이루었으나 사상 최대의 법회 이틀후인 4월7일 문정대비가 63세로 세상을 뜨게 된다.
지나친 불사와 천능·법회 등으로 민심을 혼란시키고 민폐를 일으킨다는 불만이 극도로 팽창했으나 문정대비의 서슬에 어쩌지 못하던 전국의 유림들은 문정대비의 죽음과 함께 전국에서 일제히 일어나 보우를 매도한다. 보우는 강원도 한계산 바위 밑에 숨어 있다가 체포되어 제주도 조천으로 귀양가게 된다. 그리고 두달 뒤 그는 제주목사 변협의 하수인들에게 격살되고 만다. 보우는 임종게를 남긴다.
허깨비로 와서 허깨비로 가는구나
50여년 미친 짓거리를 하다가
세상의 영욕을 다 맛보고
중의 탈바가지를 벗고 훨훨 나네
사명당은 보우가 쓴 『나암잡저』발문에서「해동의 좁은 땅에서 태어나 백세에 전하지 못하는 도통을 얻었다」고 했고 유몽인은 「모든 경서에 박학하고 시와 글에 능했다」고 했으며 이췌광은 「글과 불경을 해석하는데 밝았다」고 보우의 고학 대덕을 칭송했지만 『명종 실록』에는 그를 신돈에 비유할 요승으로까지 폄하한 것은 척불의 시각에서였을 것이다.
무슨 허깨비를 본 것 같다. 저렇듯 피폐된 조선불교를 일으켜 선교 일 체의 새집을 짓고 부처님의 말씀을 하늘 닿게 길어 올렸던 보우가 무참히 쓰러져 간 것은. 그러나 오늘 그의 법어는 살아서 이 대웅전 뜨락에 몇 만개의 연꽃으로 불을 밝히고 있지 않은가. 【사진=장충종 기자】

<봉은사운>
1
수도산 봉은사라 했는데
산 같은 산은 보이지 않고
대웅전의 금빛 세 글자가
자꾸 눈 속으로 파고든다
저것도 추사 김정희가 죽기 사흘 전에 썼다는
그 절필의 대작 「판전」과
같은 날 쓴 것인가
시인 성찬경은 「판전」앞에 서면
벼락맞은 것 같다고 시를 썼지만
그래서 인지 청팽과니인 나도
칠십일과병중작 일곱 글자가
어쩐지 마음을 쓰다듬어 주는 것 같고
못생긴 대웅전 세 글자도
우리나라의 가장 잘생긴 사내로 보인다
추사는 왜 죽음을 앞에 두고
저 글자를 써놓고 고개를 끄떡였을까?
아무래도 보우의 큰손이
그를 일으켜 붓을 쥐어준 것이 아닐까?
2
승과를 보던 넓은 마당에는
무역센터 빌딩이 목을 뽑아
봉은사에 오는 햇빛을 가리고 있다
비석거리에는 을축년 큰물 때
칠백여명을 건져 올리고
밥을 지어줬다는 나청호스님의
수해공덕비가
등 너머 넘실대는 한강을 가리키고 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법당에서는 스님의 염불을 따라
아들딸의 입학을 기원하는
어머니들의 삼천배가 이어지고
마당에는 촛불들이 한겨울을 녹이며
제주도에 유배간 큰스님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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