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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도올고함(孤喊)

공간·시간·인간 삼간의 창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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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인간이 잘 산다는 것은 의미 있게 사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의미 있게 산다는 것은 실상 의미 있는 공간으로 가득 찬 코스모스에서 사는 것이다.

건축은 '인간적 미니멀리즘'

여기서 말하는 코스모스란 작은 마을일 수도 있고, 큰 도회지일 수도 있고, 국가 전체일 수도 있고, 전 우주를 가리킬 수도 있다. 참아야만 하고 무시해야만 하는 환경에서 산다는 것은 인간의 자격을 상실하는 것이다.

나의 기철학에서는 건축이란 문명 속에서의 삼간(三間)의 창조로 규정된다. 삼간이란 공간(空間).시간(時間).인간(人間)이다. 공은 간(間)이 없는 공이 없고, 시는 간이 없는 시가 없다. 인 또한 간이 없는 인은 없다. 간(間)이란 사이를 규정짓는 무한한 관계로써 충만되어 있다. 관계는 실체를 거부한다. 그것은 무아(無我.anatman)이다. 건축은 인간의 삶을 향상시키려는 노력이다.'향상'이란 시간의 하향을 거부하는 이성(Reason)의 노력이다. 이성의 반대는 피로(Fatigue)이다. 건축공간은 인간을 피로하게 만드는 것일 수 없다. 모든 디자인은 이(理)가 기(氣)로 진입하는 것이다. 이는 기를 제한하는 형식이다.

그 형식의 조건은 어울림이다. 어울림은 중용(中庸)이다. 건축은 수학이 아니요, 이데아가 아니다. 건축에 있어서는 형이하(形而下)가 없는 형이상(形而上)을 생각할 수 없다. 건축은 기의 다양한 양태의 배열일 뿐이다. 건축의 모든 허(虛)는 기로

충만되어 있다. 따라서 공간의 빔은 기하학적 모형이 아닌 기의 유행(氣之流行)일 뿐이다. 건축은 몸이다. 나의 몸의 기의 유행과 건축공간의 기의 유행은 상통(相通)하며 상생(相生)하는 것이다.

매우 난해하게 들릴 것이다. 이상은 내가 21일 국립중앙박물관 대강당에서 한국건축가협회와 문화관광부가 마련한 공간 문화 대상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내용을 간추린 것이다. 나 이외에도 시인 장석주는 요즘 '미래파'라고 불리는 젊은 시인들의 시적 세계에서 나타나는 공간의 무장소성을 비판하였다. 그것은 구체적 장소성이 무시된 판타지의 세계며, 혼음.근친상간.이질혼재가 난무하는 비도덕적 세계며, 정체성이 부재한 세계라는 것이다. 그것은 주로 일본 만화의 영향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건축공간이 그런 공간을 닮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건축 비평가 전진삼은 '공간 만들기'보다 기존의 세계 속에서 의미 있는 '공간 찾아내기'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공간의 압축성을 표방한 초고층 건축이 오히려 공간의 낭비와 파괴와 비여유로움을 생산하였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큰 계획보다 작은 계획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영화감독 정재은은 한국 영화 속에 나타나는 다양한 공간성을 논한다. '고양이를 부탁해'를 만든 젊은 감독인 정재은은 임권택이 '천년학'에서 찾아내는 공간을 젊은 세대가 이 땅에서 도저히 찾아낼 수 없는 반면, 임권택과 같은 세대는 '고양이를 부탁해' 속에 숨은 인천 사람들의 일상적 공간을 찾아내기 힘들다고 말한다.

최현주는 사이버네틱스 이론에서 인터액티브 스페이스(interactive space)로 발전해가는 현대 피드백적 공간이론을 발표했고, 동국대학교 건축과 교수 한광야는 '공공장소(Public Space)'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도시개발이 지하철을 따라가는 데 공공공간이 지하철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서울의 현실을 비판하였다. 인문지리학자 이무용은 공간은 결국 정치라는 매우 강렬한 주제를 부각했다.

이러한 담론들은 결국 군사독재시대의 개발 열정에 무의식적으로 촉발된 건축공간문화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다. 우리 민족은 이제 허세.허식.허영.허리를 떠나 우리가 참으로 사랑하고 싶은 국가를 건설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그것은 국가를 구성하는 의미 있는 삶의 공간들을 건축하는 것이다. 그 원칙은 이제 '인간적인 미니멀리즘(humane minimalism)'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