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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등반계의 '기록제조기' 엄홍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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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호 15면

멀리 푸모리봉(7183m) 너머로 해가 떨어진다. 황금빛으로 빛나던 날카로운 칼날 능선도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하늘에 빛나는 별들과 코로 느껴지는 차갑고 희박한 공기를 통해 내가 로체샤르 정상에 있다는 것을 느낀다. 달은 하늘에서 점점 더 커진다.

신동연 기자

살아서 돌아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나를 짓누른다. 변성호(37) 대원은 설맹(雪盲ㆍ눈에서 반사되는 태양빛 때문에 각막이나 결막에 일어나는 염증으로 시간이 지나면 회복된다)에 걸렸다. 앞을 못 보는 후배를 데리고 칼날 능선을 어떻게 해서라도 내려가야 한다.

감각이 무뎌지는 지금 나는 걱정과 불안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세찬 폭풍설은 괴물처럼 덮친다. 그리고 안으로부터 커지는 고독은 나를 엄습한다. 두려움은 더욱 커지고 불안한 상태에 빠져든다. 그럼에도 죽지 않으려면 우리는 계속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달빛이 앞을 밝힌다지만 그래도 어둠 속에서 방향을 잃으면 안 되었다. 하루 종일 먹은 것은 없고 졸음은 쏟아진다. 여기서 정신을 잃으면 안 된다. 1%의 가능성만 있어도 두 대원과 함께 살아 돌아가야 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등반이요, 나의 마지막 의무다. 그리고 우리는 살아서 산을 내려왔다….’

(사진 맨 위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엄홍길 대장이 5월 21일 아침 절벽 구간을 트래버스하고 있다. 로체 남벽은 3가 넘는 직벽과 끊임없이 떨어지는 낙석 때문에 산악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다. 4월 6일 물자 수송에 나선 셰르파들이 절벽 난간 위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5월 17일, 고인이 된 에베레스트 남서벽 원정팀 오현준·이현조의 제사를 지내는 엄 대장과 대원들. 5월 31일 로체샤르 정상에 선 엄홍길. [로체=김춘식 기자]

히말라야의 ‘작은 탱크’ 엄홍길(47ㆍ트렉스타 이사)이 히말라야 원정을 마치고 돌아왔다. 로체샤르 남벽에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며 그는 한국 등반사에 새로운 기록을 남겼다.

차창 밖으로 지나는 풍경, 움직이는 사물, 군중 속에서 고독을 느낀다. 히말라야에서도 마찬가지다. 그곳에서 느끼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는 라인홀트 메스너(1986년 인류 최초로 히말라야 8000m 고봉 14좌를 완등한 이탈리아 산악인)가 이야기한 검은 고독과 흰 고독으로 나타난다.

“고독은 삶의 영원한 동반자입니다. 그것은 벗어날 수도 없고 도망가면 쫓아옵니다. 특히 웅장한 자연 앞에서는 더 큰 고독을 느끼게 됩니다. ‘산은 마음의 고향이자 인생의 안식처이며 위대한 사표’라는 깨달음을 얻었죠. 그리고 이제야 산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고 엄홍길은 말한다.

히말라야는 살아있는 위대한 자연이고 정상은 ‘죽음의 지대’다. 히말라야 원정은

‘신들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경건한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

눈사태, 낙석, 크레바스, 세락(s<00E9>rac)의 붕괴 등 모든 것이 무질서해 보이지만 그것도 나름대로 질서를 갖추고 있다. 그러한 일들은 수천 수만 년 전부터 예정되어 왔고 순서대로 진행된다. 이렇게 살아있는 생명체 앞에서 한순간의 자만심은 많은 사람의 불행을 가져올 수 있다.

등반을 하면서 지나온 자리를 뒤돌아보면 흔적은 없다. 다만 돌과 얼음만 있을 뿐이다. 고산(高山)의 세계는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극한의 세계’에서도 낙원을 찾을 수 있다. 그러기에 그는 히말라야를 떠날 수 없었다.

엄홍길은 등반을 하면서 항상 주문(呪文)을 입 속에 달고 다닌다. ‘옴 마니 반메 훔, 나무 석가모니불, 몬 사파(티베트에서 명상을 할 때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내지 말라는 주문의 일종), 따시들레(‘안녕하세요’라는 티베트어), 단네밧(‘감사합니다’라는 네팔어)을 수없이 외운다. 왜 그러한 행동을 할까. 이것은 엄홍길이 갖고 있는, 산에 대한 외경심의 발로다. 주문을 외우는 것은 두려움에 대한 극복과 불안한

마음을 카타르시스시켜주는 묘약이다.

메스너는 “인위적인 규칙이나 기준이 없는 거친 공간에서 나 자신을 시험하기 위해 극한상황을 거치고 나면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진리를 느끼게 된다. 방치되고 극한상황까지 나를 몰고 간 후에야 삶의 의욕을 느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엄홍길은 “도전은 존재에 대한 이유이고 목표를 달성했다고 도전을 끝낸다는 것은 용납이 안 된다”며 “도전은 운명이고 내 인생에서 뗄 수 없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에게 인생은 ‘끊임없는 도전 그 자체’인 것이다.

‘이제껏 사고 없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히말라야의 신이 도와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아직도 히말라야 8000m급 등반에 대한 자신감은 있지만 예전보다 체력적으로 많이 늙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신 앞에 모든 것은 ‘유한(有限)’하기 때문에 더 이상 등반에 나선다는 것은 ‘인간의 오만이고, 신에 대한 모독’이라고 말한다. 1985년 히말라야에 첫발을 내디딘 지 22년. 그 속에서 엄홍길은 무엇을 얻었을까.

“극한상황에 몰리다 보면 어느 한순간 정상을 밟은 것이나 못 밟은 것이나 대자연 앞에서는 모든 것이 하찮은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정상에 올랐다고 나에게서 변한 것이 있을까요? 그저 해냈다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없겠지요. 그게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용기란 좌절하고 싶은 내면의 적과 싸우는 살아있음의 증거이자, 포기하려는 나약함에 저항하는 뜨거운 도전의지’라고 한양대학교 김종량 총장은 말했다. 삶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자신의 두려움을 뛰어넘는 용기일 것이다. ‘작은 탱크’ 엄홍길은 우리에게 ‘용기란 무엇인가, 도전의식은 어떤 것인가’를 온몸으로 가르쳐 주었다.

그는 앞으로 거벽 등반 등 히말라야 원정을 떠나는 후배들을 적극 돕겠다고 말한다.

일선에서 물러나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앞으로 히말라야 원정에서 아깝게 목숨을 잃은 산악인과 셰르파의 유가족을 위해 민간 문화재단인 ‘히말라야 휴먼재단’(가칭)을 세울 계획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국제아동후원단체(PLAN)와 같은 비정부기구(NGO)와 손잡고 전 세계의 불우 청소년과 소년ㆍ소녀 가장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활동에 전념하겠다고 밝혔다.

엄홍길은

1960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 서울에 올라와 2000년 5월까지 도봉산 자락에서 생활했다. 양주고등학교(현 양주시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1년 해군에 입대해 UDT로 제대했다.

1985년 겨울 에베레스트 남서벽 원정대에 참가하면서 처음으로 히말라야에 발을 내디뎠다. 1988년 서울올림픽 성공 개최를 기원하는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참가해 폐막식 날 지구의 꼭짓점을 밟았다. 2000년 여름 K2를 마지막으로 전 세계에서 여덟 번째로 히말라야 8000m 고봉 14좌를 완등했다. 얄룽캉(2004)과 로체샤르 남벽(2007)을 등정함으로써 히말라야 16좌 완등이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2002년 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에 입학해 2006년 졸업했다. 체육훈장 거상장(1988), 맹호장(1996), 청룡장(2001)을 받았으며 상명대학교 자유전공학부 석좌교수, 트렉스타 기술이사, 파고다 외국어학원 홍보이사, 기상청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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