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C 중앙회장|미래 지도자 꿈꾸는「청년 대통령」|역대 회장 거의가 상공인

중앙일보

입력 1992.1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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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국내최대(회원 2만7천명)의 순수 민간단체인 JC(청년회의소)를 가리켜「JC는 한국의 정치사관학교, JC중앙회장은 청년대통령」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다소 비판적인 사람들은「애당초 정치하고 싶은 부자들이 지역기반 다시고 얼굴 알리자고 만든 보임인데 당연한 소리 아니냐」고 하겠지만 JC를 이같이 부르는 이유는 딴 데 있다
라이온스 클럽이나 로터리클럽 등은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활동을 제1의 목적으로 삼지만 JC는 정치든 사회든 어떤 분야에서 미래의 지도자가 되기 위한 훈련과 개인능력 개발이 최대의 목적이다
그래서 JC는 만20세부터 40세까지로 회원연령을 철저치 제한하고 있고 3대 원칙 중 수련이라는 항목이 봉사·우정보다 앞서 있다
JC회원들은 입회 때부터 회의진행법·연설기법·조직운영 방법에 대한 교육을 받고 있으며 조직내의 무수히 많은 직급을 올라가는데 선거와 같은 철저한 경쟁을 치르도록 하고 있다.
위계질서가 철저한 직급들을 하나하나 씩 올라가는 과정에서 성취 같은 물론 본인이 원하는 원하지 않는 지도자로서의 정치적 능력을 자연스럽게 익히는 셈이다.
오늘날 JC출신들이 국회의원 16명을 비롯해 기초의회 2백83명, 광역의회 1백43명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며 그래서 정치사관학교라는 말이 나온다는 것이다. 또 조직 내 험난한 과정을 헤치고 올라온 최종 기착지가 한국 JC 중앙회장이라는 자리여서 청년대통령이라는 말이 붙여진다는 설명이다.

<미군 중위가 전수>
한국JC는 1951년 말 평택고 영어교사였던 서정빈씨(3대 중앙회장)가 당시평택에 주둔해 있던 미5공군의 중위이자 미국 모빌시의 JC회원이었던 스포츠우드씨에게서 JC운동을 전수 받으면서 시작됐다.
서씨는 폐허가 된 국토를 청년들이 살린다는 목적으로 지역 유지였던 강건원씨(초대·2대 중앙회장)와 동료교사 10명을 규합, 12명으로「평택 청년 애향사업회」를 발기하고 JC의 이념 확산 및 본격적인 지역봉사활동에 나섰다.
이후 부산·수원에도 JC지회가 생겨났으며 53년11월 내한한 닉슨 당시 미 부통령(샌프란시스코 JC회원 출신)이 한국 JC간부들을 만나 격려한 것이 각계의 주목을 끌며 비약적인 발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JC출신 국가원수들이 어떤 나라에 방문할 때 그 나라의 JC간부들을 만나는 것은 JC회원간의 전통과 유대를 과시하는 일종의 관례로서 닉슨은 그후 대통령이 된 뒤 김포공항에 닿자마자 JC회장을 찾는 바람에 청와대에서 뒤늦게 JC중앙회장을 부랴부랴 부르는 소동을 빚기도 했다.
역시 일본 JC출신이었던 나카소네 수상과 가이후 수상의 방한 때도 이들은 묵고 있던 호텔 신라로 JC회장을 초청, 당시 유일하게 독대 했을 정도였다.
53년에는 한국JC본부가 평택에서 서울로 옮겨왔고 이때부터 리더십 훈련, 책임분담 제 등 본격적인 JC활동들이 펼쳐졌다.
이후 대한학술원 원장이 된 심종섭씨(5대회장)와 호주대사를 지냈던 민충식씨(9대회장) 등 해외유학까지 가세했고, 60년대 초반부터는 일반상공인들의 참여가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현재 JC회원들의 업종별분포를 보면 건축·요식·금융·운수 등의 순으로 상공인이 가장 많은 51%이며 그 다음이 농업 5%, 의사4%, 어업3·7%, 공인회계사 1·4%, 학계 1·3%등의 순이다.
특이한 경력의 중앙회장 중에는 KBS아나운서 출신으로 당시 임택근 아나운서와 쌍벽을 이뤘던 13대 황우겸씨를 들수 있는데 황씨는 바쁜 와중에서도 JC초기 때부터 왕성한 활동을 했다.
황씨는 이후『JC 역사와 실화』라는 책을 발간했고 JC역사의 산증인으로 평가받으면서 지금까지도 후배들에게 가장 입김이 센 사람으로 남아 있다.
중앙회장은 아니지만 70년대 한국씨름의 대명사였던 김성률씨가 83년 마산 JC회장을 지냈으며 이만기 장사도 JC회원으로 적국 활동하고 있다.
60년대 중반이후부터 내노라 하는 기업인들이 중앙회장단에 진출하기 시작해 동아제약 강신호 회장이 67년 16대회장, 70년엔 대한항공사장 조중건씨(현 부회장)가 19대 회장에 각각 선출됐다.
특히 조 회장은 안국약품 사장인 어준선씨와 열띤 경합이 불자 대한항공의 헬기를 타고 지방의 지구와 지회를 누비며 선거운동을 한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70년대 들어서는 JC회원들의 국회출마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는데 중앙회장으로는 신동욱씨가 전주에서 출마했다가 낙선한 반면 유신당시 회장이었던 김충수씨는 유정회의 직능단체 영입 케이스로 손쉽게 첫 국회의원이 되기도 했다. 75년 24대 회장을 지낸 고 윤국노 회장은 광명-시흥에서 3선의 영광을 누렸는데 윤 의원은 어찌나 JC에 애착이 있었던지 간암으로 사망하기 보름 전까지 선배로서 JC행사준비를 지휘자기도 했다.
13대 선거 때 대구에서 당선된 이정무씨(26대)와 14대 의정부에서 재도전 끝에 성공한 문희상 의원(34대)도 중앙회장 출신이다
한편 중앙회장 중에서도 독 거한 개성을 지닌 사람들이 많아 중앙대 교수이자 스위스그랜드호텔 소유주인 29대 이우진씨의 경우에는 이조왕가의 후손답게 귀족처럼 조용하고도 세련된 매너로 평판이 났고, 31대 이홍경 뉴욕제과 회장은 영화배우 뺨치는 외모에다 국제적인 패션감각으로 유명했다

<위상 크게 높아져>
반면 33대 조종성씨는 JC회원간의 위계질서를 잡기 위해 재임기간 중 한번도 JC사람들과는 목욕도 함께 하지 않아 화제가 됐다
80년대 중반 들어서는 청와대 초청행사 때 JC 중앙회장의 좌석이 경제단체장 석 바로 다음이 될 정도로 위치가 높아졌고 이에 따라 중앙회장이 되기 위한 경합도 갈수록 치열해졌다.
88년 제주도에서 1박2일로 열린 37대회장 선거에서는「91년 소득세 납세 1위」로 유명한 안병균 나산그룹회장과 대림전차 대표인 지성경씨가 맞붙었는데 1만5천여 명이나 되는 회원들이 총동원되는 바람에 주말 비행기와 호텔이 완전치 동나 버려 당시 제주도 신혼여행이 거의 불가능했다.
제주거리마다 수백 개에 달하는 양 후보의 플래카드가 내 걸리고 도내 전 술집의 술이 말랐다고 했을 정도로 득표전쟁이 벌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양 후보는 국회의원 선거에 버금가는 많은 돈을 쓴 것으로 알려졌다.
결과는 지 후보의 승리로 끝났지만 조직 내에 파벌이 생기고 사회 각계의 비난이 일어나는 등 후유증이 엄청나고 이후로는 역대 중앙회장 자문회의 등 원로들이 사전에 막후조정, 단일 후보를 내세워 찬반투표를 하는 방식으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효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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