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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톡톡 튀는 상상력 유쾌한 말잔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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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황인숙(45.사진)씨가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이후 5년 만에 다섯번째 시집 '자명한 산책'을 펴냈다. 앞부분 작가의 말에서 '돌이켜보면 내 시가 후한 값을 받았는데 그게 다 빚이니 힘을 내서 빨리 빚을 까자!'고 외친 황씨는 시집 뒷면에서는 '내 시가 최소한 세상에 악취를 끼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빚을 '갚자'가 아니고 '까자'고 외치는 장난끼와 자신의 시를 읽는 일이 산뜻하고 즐거운 경험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황씨의 시가 어떤 진폭 안에서 움직이는지, 그 범위를 밝혀준다.

과연 시집 곳곳에서 재기발랄한 상상력과 쾌감 신경을 건드리는 어휘 등이 빛을 발한다. '가을밤 2'의 귀뚜라미는 "씩씩하고 우렁찬 노랫소리"로 우는데 그 울음 소리는 "뭐가 쓸쓸해? 뭐가 쓸쓸해? 뭐가?! 뭐가?! 뭐가?!"로 들린다. 인간의 울음을 우는 귀뚜라미 소리를 듣다 보니 시인은 "명랑한 소름"이 돋는다. '병든 사람'은 "굉장히, 굉장히/어려운 방정식"을 "혼자서/하염없이 외롭게/혼자서" 몸으로 풀어야 하는 사람이다. "아주 오래 전 추운 봄날""차가운 햇볕 속에서" 목격했던 '코끼리'의 코는 주렁주렁 추위를 매단 잿빛 주름살의 고드름처럼 보였었다.

'삶은 감자'는 통쾌까지는 아니지만 유쾌.상쾌하다. "이건 확실히/잘못 선택한 밤참이다/한 번이라도 감자를/삶아본 적이 있는가?/스무 번도 더 냄비 뚜껑을 열고/젓가락으로 찔렀다/열대야처럼 푹푹/김 속에서 감자들/生을 수그리지 않는다/쉭쉭거리며 가스불은 시퍼렇게 달려들고/냄비는 열과 김을 다해 내뿜고/감자는 버티고 있다/덥고 지루한 싸움이다/눈꺼풀이 뻣뻣하고 무겁다/이렇게까지 해서 감자를 먹어야 하나?/한 번 더 찔러보고 아직 아니라면/그냥 자야겠다/우, 삶은 감자!"

무슨 바람이 불어 하필 감자가 먹고 싶어졌는지 모르지만 '조리 과정'은 지난(至難)하고 결국 배고픈 화자는 "우"하는 탄식을 뱉어낸다. 마지막 행 '삶은'에서 '삶'은 '보일드(boiled)'와 '라이프(life)' 모두로 읽힌다. 인생은 감자처럼 쉽게 수그리지 말고, 덥고 지루한 싸움으로 버텨내야 하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기질적인 장난끼와 즐겁게 시를 쓰고 싶다는 희망도 시인을 결국 한줌 재로 만들고 말 시간의 횡포로부터 구제하지는 못한다.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소슬소슬!/거미줄을" 흔드는('거미의 밤' 중) 가을밤에 시인은 문득 쇠약해지고, 수많은 기억이 포개진 위에 균열까지 만드는 빠르고 많은 세월은 기가 막히다('주름과 균열').

단풍이 들면 나무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잎들을 떨굴 것이고 시인과 시인의 친구들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늙어갈 것이다. 귀뚜라미가 베어물 듯 우는 가을밤은 "온 생이 어질어질 기울어지는/벼랑 같은/밤"이다('가을밤 1' 중).

"스스로 비관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속절없이 늙어가는 것에 절망하는 것 같다"는 물음에 황씨는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들은 일이 되어가는 대로 놔둘 수밖에 없지 않나. 그런 점을 인정하는 것이지 마냥 슬퍼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40대 중반 황씨의 시들은 장난스럽고, 유쾌하고, 때론 우울하다.

글=신준봉, 사진=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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