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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억원짜리 길거리 연주 … 아무도 몰랐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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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호 02면

국내 정상급 연주자인 피호영 교수가 허름한 복장으로 거리의 악사처럼 위장한 채 지하철 2호선 강남역 지하에서 70억원짜리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연주하고 있다. 지난 1월 미국 워싱턴에서 세계적 연주자 조슈아 벨이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연주해 32달러를 벌어들인 이벤트를 국내에서 재현했다. 신동연 기자 

조인스TV 거리의 악사 '강남역에선 어떨까?' 동영상보기

피호영 교수가 스트라디바리우스로 지하철역서 깜짝 이벤트 … 1만6900원 모금

2일 오전 8시45분 서울 지하철 2호선 강남역 6번 출구. 후줄근한 청바지와 셔츠 차림에 낚시 모자를 눌러쓰고 수염까지 덥수룩하게 기른 한 남자가 악기 케이스에서 바이올린을 꺼냈다.

영락없는 거리의 악사다. 그러나 놀랍게도 주인공은 국내 정상급 바이올리니스트 피호영(47ㆍ성신여대 교수)씨.

서울대ㆍ파리음악원에서 공부했으며 서울시향 수석 주자와 코리안 심포니 악장(樂長)을 지냈다. 2002∼2004년 세계 정상급 연주자들로 구성된 ‘수퍼 월드 오케스트라’에 유일한 한국인 단원으로 참가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꺼낸 바이올린이 국내에 없는 세계적 명품 스트라디바리우스 ‘엑스 알반 베르크’(시가 약 70억원ㆍ1717년산)라는 사실. 일본으로 가는 스트라디바리우스를 한국 막홀드(대표 김성현)에서 어렵사리 빌려왔다.

이날의 이벤트는 세계 음악계의 화제가 됐던 이벤트를 한국판으로 재현한 것이다. 1월 초 미국이 낳은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조슈아 벨(39)이 워싱턴 랑팡역에서 지하철 악사로 변장해 45분간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연주해 32달러(약 3만원)를 벌었다. 이 기사를 읽은 피호영씨가 중앙일보에 연락해 왔다. “서울에서 비슷한 실험을 해보면 어떨까”라는 농담 섞인 제안이었다.

피씨는 SBS 드라마 ‘모래시계’의 주제음악으로 유명한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소나타 제12번’을 시작으로 엘가의 ‘사랑의 인사’, 사라사테의 ‘지고이네르바이젠’, 마스네의 ‘타이스의 명상곡’, 바흐의 ‘무반주 소나타 제1번’ 등 명곡을 연주했다.

지하철 2호선 강남역은 하루 평균 이용객 24만 명으로 수도권 지하철에서 가장 붐비는 곳이다. 출퇴근 러시아워 이용객만도 10만6000명이다. 이날 연주가 계속된 오전 9시30분까지 강남역 6번 출구를 통과한 사람은 9500명. 바이올린 케이스에 돈을 넣고 간 사람은 모두 21명, 총액 1만6900원.

외국에서 지하철 악사를 자주 만났다는 20대 대학생은 “출근길에 상쾌한 음악을 들으니 마음이 차분해진다”며 지갑을 열었다. 악보를 흘깃 들여다보는 사람, 악기 케이스에 돈이 얼마나 있나 유심히 들여다보는 행인도 있었다.

2분 넘게 발길을 멈추고 서서 한 곡이 끝날 때까지 서서 음악에 귀 기울인 사람은 5명. 가수 비의 호주 공연을 성사시킨 공연 기획자 김선영(44)씨는 무심코 지나쳐 계단으로 올라가다가 다시 내려와 5분 정도 유심히 들었다. 그는 “거리의 악사치고는 연주가 보통 수준이 아니어서 호주 무대에 소개해 볼까 하고 명함까지 건넸다”고 웃었다.

이날 이벤트를 알아보는 사람은 딱 세 명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연주에 아랑곳하지 않고 바쁜 걸음을 재촉했다. 걸어가면서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 사람은 그나마 관심이 있는 편이다. 현대인들은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무감각해진 걸까.

연주가 끝난 뒤 피호영씨는 “생각보다 음향이 좋았고 많이 쳐다보고 생각보다 많이 벌었다”며 만족해 했다. 워싱턴과 비교하면 절반의 수입이지만 우리나라에서 이 정도면 크게 실망스럽지 않다는 표정이다. 이벤트 전 과정을 촬영한 동영상은 중앙 SUNDAY 홈페이지(sunday.joins.com)와 조인스닷컴(joins.com)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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