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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다르게 살아갈 뿐인 그들, 게이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호 14면

남자이지만 여자가 되고 싶은 패트릭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플루토에서 아침을’의 한 장면.

닐 조던 감독 영화 ‘플루토에서 아침을’의 패트릭은 여자가 되고 싶은 소년이다. 예쁘고 화사한 색깔을 좋아하는 그는 여장 남자만이 가지고 있는 부드러운 허스키 톤 목소리로 노래하면서 자신의 상처를 허공에 날려보낸다. 패트릭은 감옥에 갇힌 다음에도 그곳이 사랑스럽고 조그만 방이라고 믿으려 애를 쓴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아기 때 버림받은 데다 여자 같다고 따돌림당하는 소년이 어쩌면 이토록 철저하게 현실을 무시할 수 있을까.

그런 의문은 조던 감독이 13년 전에 만들었던 영화 ‘크라잉 게임’을 떠올릴 때 복잡한 미궁에 빠지게 된다. ‘크라잉 게임’은 아일랜드 공화국군과 클럽에서 노래하는 여장 남자의 사랑을 애처롭게 바라보는 영화였고, 거기엔 한 남자의 죽음이 얽힌 숙명, 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의 정치적 긴장, 동성애가 내포하는 불안함 등이 뒤엉켜 있었다. 그렇다면 닐 조던은 ‘크라잉 게임’과 ‘플루토에서 아침을’ 사이에 무슨 일을 겪었던 건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혹은 그 사이 세상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걸까를 물어도 좋을 것이다.

한때 게이(남성 동성애자)는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가슴 아픈 게이 로맨스 ‘브로크백 마운틴’이 들려주듯 그들은 단지 남자를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린치를 당했고, 게이가 아닌 척하며 여자와 결혼해 가정을 만들어야만 했다. 그러나 현대가 배경인 대중문화가 게이를 다루는 방식은 이와는 사뭇 다르다. 10년쯤 거슬러 올라가 보자면 1997년 작인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이 있었고, 2000년대로 접어들면 시트콤 ‘윌 & 그레이스’가 있는데, 이들이 보여주는 게이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게이는 여자의 가장 좋은 친구’ 정도가 될 것이다. 거의 처음으로 게이 남자친구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었던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의 조지는 잘생기고 다감하고 눈치도 빠른 친구다. 그는 뒤늦게 친구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결혼식을 막고자 동분서주하는 줄리앤을 따라다니면서 온갖 사고를 수습해준다. ‘윌 & 그레이스’의 윌도 마찬가지다. 잘생긴 변호사 윌은 연애에 서툴기만 한 그레이스를 곁에서 지켜보며 용기를 북돋워주고, 상처를 입은 채 돌아온다면 말없이 안아준다. ‘섹스 & 시티’의 캐리와 샬럿도 스탠퍼드와 앤서니라는, 힘들 때면 언제나 “너는 예쁘고 멋진 여자”라고 다독여주는 게이 친구를 가지고 있다.

이처럼 게이가 여인의 친구로 부상한 데에는 그들이 섬세하고 예민한 감각을 지니고 있다는 믿음이 자리하고 있다. 실제로 지아니 베르사체와 칼 라거펠트 같은 유명 디자이너들이 게이이기도 하다. 이런 믿음을 활용해 인기를 얻은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퀴어 아이’다. 스타일리스트 카슨과 인테리어 디자이너 톰, 음식감정가 테드 등이 스트레이트 남성의 스타일을 고쳐주는 ‘퀴어 아이’는 스핀 오프로 여성이 대상인 ‘퀴어 아이 걸’까지 생길 만큼 인기를 얻었다. 이들은 할인매장 청바지를 벌레 취급할 만큼 감각 있고 부유하지만, 프로그램에 팁으로 삽입되는 일종의 ‘생활의 지혜’를 보면, 만만치 않은 살림꾼이기도 하다.

수퍼모델 하이디 클룸이 신인 디자이너를 발굴하는 리얼리티 프로그램 ‘프로젝트 런웨이’에도 제1시즌 우승자인 제이와 눈물 많은 안드라에, 가냘픈 대니얼을 비롯한 많은 게이가 참가했다. 게다가 게이는 생물학적으로 남성이다. 여자친구들과는 밤이 새도록 수다를 떨어도 캐낼 수 없는 남자의 비밀을, 게이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눈여겨보아야 하는 사실은 게이를 쿨하고 감각적이고 다감하게 그리는 영화와 프로그램에서 그들은 조연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주인공들의 스타일과 감각을 받쳐주는 역할만을 하면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변화는 분명하다. ‘퀴어 애즈 포크’ ‘L워드’ ‘엔젤스 인 아메리카’ 등의 프로그램에서 게이와 레즈비언은 성정체성을 부인하거나 사회로부터 버림받아 고통을 겪는다기보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연애와 가족과 직장문제를 고민한다. 숱한 박해와 고난의 세월을 거쳐온 지금 게이는 이상하거나 병적인 존재가 아니다. 다만 조금 다르게 살아갈 뿐인데. 우리 모두 남들과는 조금씩 다르게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오래전 게이 친구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게이들은 왜 그렇게 다들 몸도 좋고 옷도 잘 입어?”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다 그런 건 아니야. 그런 게이들이 눈에 띌 뿐이지.” 대중문화가 존재하는 한 게이는 지금처럼 스타일리시한 여피로 그려질지 모른다. 그러나 세상에는 숱한 게이와 숱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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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코미디는 싫어하지만 ‘섹스 앤 시티’는 보고 또 보는 김현정씨는 영화잡지 ‘필름 2.0’ ‘무비위크’를 거쳐 ‘씨네21’에서 글을 쓰는 논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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