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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당…복귀…경선 불참 세 갈래길 고수하는 손학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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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 04면

손학규 전 경기지사(오른쪽)가 15일 오후 강원도로 떠나기 직전 박종희 비서실장과 뭔가를 상의하고 있다. 신동연기자 

15일 강원도 사찰로 들어간 손학규 전 경기지사가 사흘째 서울로 돌아오지 않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야당 투사 시절을 연상시킨다.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는 17일 오전 그를 만나러 설악산 백담사로 출발했다. 손에는 전날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수용키로 한 새 경선안이 들려 있었다. 8월에 20만 명의 선거인단으로 치르는 방식이다. 6월에 4만 명으로 치르는 현행 규정에 비해 “시기는 늦추고 선거인단 규모는 확대해야 한다”는 손 전 지사 측 주장을 많이 반영했다. 박재완 대표 비서실장은 “검증 청문회를 비롯해 손 전 지사 쪽 요구를 최대한 수용하려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설악산 해발 1224m에 자리한 봉정암에서 하루 묵은 손 전 지사는 이날 새벽 박종희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했다. “혼자 생각할 시간을 갖고 싶으니 강 대표가 오지 않았으면 한다”는 얘기였다. 18∼19일께 만나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설악산으로 향하던 도중 이 얘기를 전달받은 강 대표는 오전 9시15분쯤 면담을 포기하고 차를 돌렸다. 손 전 지사를 압박하는 모양새가 부담스러운 듯했다. 손 전 지사는 봉정암에서 내려와 다른 장소로 갔다.

참모들의 의견을 종합해 보면 손 전 지사가 선택할 수 있는 진로는 세 가지다. 우선 한나라당을 떠나 보수도 진보도 아닌 중립지대에 ‘제3지대’를 구축하는 방법이다. 지지도가 좀체 오르지 않는 당 내에서 갑갑하게 경쟁하느니 차라리 밖에서 승부를 내는 게 낫다는 논리다. 손 전 지사는 최근엔 한나라당에 대한 깊은 실망을 쏟아냈다. 15일 21세기 동서포럼 초청 강연에서 “세몰이ㆍ줄서기의 구태정치를 청산하지 않고 어떻게 나라를 새롭게 만들 것인가”라고 말한 게 한 예다. 그는 “나와 진대제 전 장관,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함께하면 드림팀”이라는 발상도 내놨다. 산으로 가기 직전에 들른 ‘전진코리아’ 창립식에서는 “새로운 정치질서의 실현을 위해 준비해야 한다”는 내용의 격려사를 했다. 모두 제3지대를 연상시키는 언행이다. 정성운 대외협력실장은 “단순히 경선 참여 여부가 아니라 당에 남느냐 떠나느냐에 대한 것까지 포함한 큰 고민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을 떠나는 것은 큰 부담이다. 이인제 의원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 손 전 지사와 함께 탈당 기로에 서야 하는 참모들의 번민도 만만치 않다.

그래서 절충적으로 떠오른 카드가 경선엔 불참하되 당은 떠나지 않는 방법이다. 지금 흐름에선 손 전 지사가 당내 경선을 통과할 승산이 낮다. 경선에 참여했다 지면 이번 대선에선 끝이다. 다음 번을 기대해야 한다. “차차기(次次期)는 없다”고 해온 손 전 지사로서는 차라리 경선 후보 등록을 하지 않는 편이 유리할 수 있다. 안효수 선관위 공보과장은 “선거법상 경선에 출마했다 떨어지면 다른 당 후보로 나설 수 없지만 경선에 나가지 않으면 이후에도 출마가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만일 이 전 시장과 박 전 대표가 경선 과정이나 본선에서 치명타를 맞으면 손 전 지사에게 기회가 올 수 있다. 당 내에서 길이 안 열리면 밖에서 방법을 모색하는 것도 가능하다. 현실적인 안이다. 문제는 손 전 지사 이미지와 안 어울린다는 점이다.

손 전 지사는 2000년 5월 당 총재 경선에 나선 적이 있다. 당시 ‘이회창 대세론’이 등등했지만 그는 “줄서기 정치 타파”를 주장하며 도전장을 냈다. 부총재 경선으로 돌리자는 의견에도 불구하고 총재 경선을 강행했다. 결과는 득표율 3.6%의 참패였다. 그러나 2년 뒤 의원직을 던지고 경기도지사에 출마, 당선되면서 대선 주자의 반열에 올랐다. 이런 게 그의 스타일이다. 더욱이 경선이 8월로 연기돼 당 내에서 5개월간 독자 행보를 해야 하는 갑갑한 상황이다.

손 전 지사가 경선에 참여할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제기된다. 그가 산사에 머무르는 사이 ‘8월 21일 경선안’이 전격 합의됐다. “상대편이 가시화한 뒤에 본선 경쟁력을 기준으로 후보를 뽑아야 한다”는 그의 주장과 어느 정도 맞는 경선 룰이다.

지지율이 1%를 맴돌던 시절에도 손 전 지사는 자신만만했다. 이윤생 메시지팀장은 “경기도지사 시절부터 ‘내가 (대통령으로)가장 잘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없으면 떠나라’는 말을 참모들에게 했다”고 밝혔다. 그래서 한 달 전만 해도 손 전 지사의 탈당이나 경선 불참은 현실성 없는 시나리오로 여겨졌다. 1월 24일 당 상임고문단 간담회에서 손 전 지사는 “당을 깰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우리의 품격을 낮추는 것으로 당 고문들이 걱정하지 않도록 (경선 승복)약속을 지키겠다”고 했다. 이런 분위기는 2월 25일 그가 “특정 후보를 위해 들러리를 세우는 (경선)룰에는 합의할 생각이 없다”고 선언하면서 확 바뀌었다. 강 대표가 대선 주자들을 초청한 자리에서였다. 이때부터 강경 기류를 탔다.

3월 15일 ‘전진코리아’ 창립 격려사에서는 “지금까지의 수구적인 정치세력, 역사를 거꾸로 읽는 정치세력들은 이제 여러분 앞에 굴복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나라당에 대한 공격으로 읽힐 수 있는 표현을 내놓은 것이다. 무엇이 한 달 사이에 그를 급변하게 했을까.

당 경선준비위원회의 경선 룰 논의가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하다. 손 전 지사의 경선 대리인 정문헌 의원은 “경준위가 출범할 때(2월 초)만 해도 손 전 지사는 ‘당이 대승적 차원에서 본선 경쟁력이 높은 후보를 뽑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표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경선 룰이 본선 경쟁력을 잣대로 논의되는 게 아니라 이 전 시장과 박 전 대표의 흥정처럼 이뤄지고 있다고 걱정했다.

거기에 이 전 시장의 ‘시베리아 발언’이 기름을 끼얹었다. 이 전 시장은 지난 5일 손 전 지사의 탈당 가능성에 대해 “나간다는 사람들은 결국 나가지 않는다. 안에 남아도 시베리아에 있는 것이지만 나가도 추운 데 나가는 것”이라고 했다. 다음 날 손 전 지사는 “(이 전 시장이) 나갈 테면 나가라고 나를 놀리고 있다”며 발끈했다.

초조한 당 지도부는 그의 경선 동참을 요청한다. 손 전 지사가 이탈하면 비영남권ㆍ진보ㆍ서민 지지층이 한나라당에 등을 돌릴 수 있다. 다른 주자들도 그의 경선 동참을 희망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 전 시장은 17일 기자와 만나 “내가 경준위 안을 받은 것도 손 전 지사 때문”이라며 “우리야 형ㆍ동생 하는 사이니 (서울에 오면) 만나야지”라고 했다.

손 전 지사 쪽 기류는 여전히 차다. 박종희 비서실장은 “16일에도 손 전 지사가 헬기를 타고 봉정암에 갔다는, 사실과 다른 보도가 나왔는데 이런 상황에서조차 누군가 음해를 한다”며 불쾌해했다. 조만간 마음을 정하고 돌아올 손 전 지사가 당과 화해의 악수를 할지, 당을 박차고 나가 ‘제3지대’를 구축할지 참모들이 더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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