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진단] 황혼이혼이 번진다

중앙일보

입력

월간중앙

▶ 한 가족이 이혼문제로 가정법원으로 향하고 있다.

"황혼이혼’이 무서운 속도로 늘고 있다. 지난해에는 이혼율 순위 1위를 기록했다. 지난해 협의이혼을 신청한 부부 가운데 결혼기간 26년이 넘은 황혼이혼 신청이 가장 많은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이는 지난 3월14일 서울가정법원이 지난해 협의이혼을 신청한 부부 3,354명을 대상으로 벌인 상담 사례를 종합 분석한 결과다.

가정법원에 따르면 동거기간별 협의이혼 신청 건수는 결혼 후 ‘26년 이상’이 605명인 전체의 18%로 가장 비율이 높았다. 이어 ‘7~10년’ 15%(443명), ‘16~20년’ 14%(476명)였으며, ‘1~3년’은 10%(358명), ‘1년 미만’은 4%(141명)에 그쳤다. 황혼이혼이 신혼부부 이혼보다 4.2배 많은 셈이다.

이기춘 서울가정법원 상담위원은 “신혼부부보다 가부장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 참고 견디던 여성들이 자녀 독립 후 이혼을 제안하는 경우가 이혼의 주된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고 말했다. 황혼이혼의 전형적인 경우는 오랜 기간 남편의 외도·폭언·폭행이다.

지난 2월에는 80세의 한 할머니가 이혼소송을 제기해 결국 이혼 판결을 받아냈다. 서울가정법원 가사4부는 80세 여성 최모 씨가 남편 김모 씨를 상대로 낸 이혼소송에서 “남편은 위자료 1억 원과 재산분할로 8억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판결문의 내용도 전형적인 경우다.

“남편 김씨가 다른 여자와 장기간 동거하면서 부정한 행위를 하고, 생활비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으며 아내를 무시하고 폭언과 폭행까지 함으로써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줬다”고 밝혔다. 슬하에 3남4녀를 둔 최씨는 남편이 40여 년 전부터 다른 여자와 동거하면서 두 명의 자식을 낳고, 생활비도 제대로 주지 않은 데다 폭행과 폭언을 일삼자 이혼소송을 냈다.

황혼이혼이 늘면서 가정법원 가사분쟁조정의 중요성도 더욱 커지고 있다. 이혼·재산분할 등 가사분쟁은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부부의 인연을 철저히 파탄내고 가족 간의 인간적 관계마저 붕괴시킨다. 100여 명의 조정위원이 활동 중인 서울가정법원도 최근 할아버지 할머니 사이에 벌어지는 기이한 분쟁을 조정하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다.

지난해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회의 조정 성공 사례 하나. 대한민국 2007년의 트렌드와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경우로 법원 주변에서 아직도 회자하고 있다. 남편 P(67)씨는 아내 Q(63)씨가 춤선생과 간통했다며 이혼소송을 제기했다. 이른바 ‘황혼불륜’ 사건이었다.

부부의 모든 재산은 남편 P씨 명의였다. P씨는 남대문시장 일대에 상가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고 월세 수입만 수천만 원에 달했다. P씨는 간통을 저지른 할머니가 재산분할을 주장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조정위원들의 판단은 달랐다. 조정 과정에서 할머니의 억울한 사연이 반영됐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결혼 후 40년간 시장바닥에서 일하면서 세 자녀를 키웠고 최근까지도 리어카를 끌면서 일했다.

할머니는 “춤선생이 너무 잘해줘 마음이 탁 트이고 좋았다”며 “딱 한 번 춤선생과 잤으나 내가 나쁜 사람이니 방 한 칸만 얻어달라”고 호소했다. 결국 조정위원들은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일정액의 재산분할을 받을 수 있도록 조정했다.

최근 40대 후반 중년부부들의 이혼 트렌드에는 ‘대입이혼’이라는 ‘장르’가 있다. 자녀가 대학에 입학하는 시기를 기다려 도장을 찍는 것이다. 중·고교생 시절의 이혼은 아이들의 공부를 방해하니 대학에 입학시키고 나서 이혼하겠다는 것이다.

▶ 한 부부가 이혼을 위해 법정에 섰다.

올해 둘째아들이 대학에 입학한 김은숙(54·가명) 씨는 지난 수년간 각방생활을 하던 남편과의 결혼생활을 청산했다. 남편의 외도와 낭비벽을 견디다 못한 결단이었다. 아이들은 이혼 과정에서 김씨의 입장에 공감했다.

“공부도 공부지만 아이들이 성장해서 판단력이 생겨야 내가 이해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자녀가 미성년자인 경우 발생하는 친권·양육권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다는 점도 ‘대입이혼’을 고려하는 이유다. 카센터 사장 조정진(52·가명) 씨는 아내의 외도로 2년 전부터 이혼을 결심했다. 분노로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았지만 아이들이 받을 엄청난 충격을 고려해 2년을 참았다. 막내딸이 올해 서울지역 명문대에 합격한 후 그는 아이들에게 이혼 결심을 알렸다.

구체적인 이혼 사유를 알리지 않은 채 두 딸이 부모 양쪽 거처를 무시로 드나들 수 있도록 했다. 이혼이 아이들에게 주는 충격파를 최소화하기 위한 두 사람의 고육지책이었다.

이혼한 주부 이모(61) 씨는 60세 생일을 맞은 다음달인 지난해 6월부터 국민연금을 받고 있다. 매월 41만여 원씩이다. 평생 국민연금에 가입한 적이 없는 이씨가 받는 돈은 직장인이던 남편 연금에서 나온다. 남편이 원래 받을 연금 총액(83만 원)의 절반인 셈이다.

이혼하면 남편이 연금을 낸 기간 중 결혼기간에 해당하는 만큼 연금액의 절반을 이혼한 아내에게 줘야 한다. 국민연금은 부부가 함께 일군 재산이라는 의미에서 이혼한 부부에게 금액을 나누도록 되어 있다. 이씨의 경우 결혼기간이 17년여로, 연금 가입기간과 같아 정확히 남편이 받는 연금액의 반을 받는 것이다.

우리와 경우가 다소 다르지만 일본 역시 ‘이혼 대기’ 부부들로 화제다. 경제적 이유로 이혼을 망설이던 일본 여성들이 4월부터 대거 이혼에 나설 것으로 예상되는 것이다. 4월부터는 후생연금 ‘부부분할제도’가 실시돼 여성들이 이혼 후에도 남편의 연금을 나눠 가질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친권, 양육권문제 해결도 쉽다

이 제도가 시행되면 월급쟁이 남편을 둔 전업주부는 최대 50%까지 남편의 연금을 가져갈 수 있게 된다. 실제로 연금분할 시행을 앞두고 이혼을 보류하는 여성이 늘면서 지난해 이혼 건수는 이례적으로 26만 건까지 뚝 떨어졌다. 일본의 이혼 건수는 계속 증가세를 이어오다 2002년에는 29만 건으로 최대치를 기록한 바 있다.

일본 제일생명경제연구소의 나가하마 도시히코 주임 이코노미스트는 “새 제도 시행을 기다리는 ‘이혼 예비군’이 4만2,000쌍으로 추정된다”면서 “연금분할제도의 영향으로 올해 이혼율이 증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아울러 올해는 1947~49년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인 ‘단카이세대’가 대량 퇴직을 시작하는 시기로 이혼 희망 여성은 퇴직금도 함께 챙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고 있다. 지금까지는 전업주부가 이혼할 경우 연금을 최대 6만6,000엔 정도밖에 지급받을 수 없었다. 새 제도 시행을 앞두고 ‘모범적인’ 가장으로 변신하기 위해 특별강좌에 참가하는 남성도 늘고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