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남기고] 군자리에서 오거스타까지 3. 치치 로드리게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치치 로드리게스가 필드에서 중세 기사 복장으로 포즈를 취했다. [골프다이제스트 제공]

마스터스는 내 생애 최고의 대회였다.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코스도 내가 라운드해본 골프장 중 단연 최고였다.

드라이빙 레인지에 출전 선수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붙여 전용 연습 타석을 마련해 놓은 것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타석마다 연습용 공이 피라미드처럼 수북이 쌓여 있었다. 모두 새 공들이었다. 요즘에는 일본에서도 그렇게 하고 있다. 하지만 그 당시 일본 투어에 참가한 선수들은 연습장에서 공을 사서 썼다. 한국에서는 아직도 프로 골퍼들이 연습공을 사서 쓰는 대회가 있다.

1973년 마스터스에는 갤러리가 하루 6만~7만 명이 모였다. 요즘엔 하루 10만 명이 가량이 입장한단다. 흰색 원피스 차림의 캐디들의 복장과 일하는 방식도 특이했다. 그들은 골프장 어디에서나 휴지나 담배꽁초가 떨어져 있으면 그 자리에서 주워 원피스의 배 부분에 달린 작은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골프장 운영방식이 철저하게 손님들 위주였고, 종업원들의 골프장 사랑 정신이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배어 있었다.

최근 우리나라 골퍼들의 실력은 급성장했지만 골프장 운영 방식은 아직도 전근대적이라는 생각이다. 너무 돈벌이에 치중해서일까. 한 해 30억~40억 원의 흑자를 내는 골프장이 있다는 말도 들었다. 그래서 하는 얘긴데 골프장도 호텔처럼 등급제를 실시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종종한다. 명문 골프장은 그린피를 비싸게 받고, 시설이나 서비스가 떨어지는 골프장은 싼값에 이용할 수 있도록 말이다.

마스터스와 관련해 떠오르는 인물은 푸에르토리코 출신인 치치 로드리게스(72) 선수다. 마스터스는 대회 개막 전날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코스에 있는 파3 나인홀을 도는 '파3 콘테스트'를 연다. 어느 홀인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나와 한조였던 그는 "45도로 휘어지는 묘기로 그린을 공략하겠다"고 큰소리를 친 뒤 티잉 그라운드에 올라섰다.

그런데 그의 샷은 휘어 나가다 그만 물에 빠지고 말았다. 그는 곧바로 익살스러운 표정에 과장된 제스추어를 섞어가며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네"라고 크게 떠벌여 갤러리들의 환호와 박수를 받았다. 그는 골프를 잘 칠 뿐 아니라 팬을 즐겁게 해 주는 능력이 있었다. 당시로는 대단한 쇼맨십이었고 프로정신으로 무장된 선수였다. 로드리게스는 버디를 잡거나 멋진 샷을 하고 나면 퍼터나 클럽을 한 손에 쥐고 펜싱칼처럼 휘두르는 제스처로도 유명하다.

그는 골프와 관련된 많은 명언을 남겼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의 말 중 하나는 "대다수 아마추어가 제대로 사용할 줄 아는 골프 용구는 연필 뿐"이라는 것이다. 골프가 그만큼 어렵다는 말이리라. 미국 프로골프협회(PGA) 투어에서 통산 8승을 올린 그는 인기 만점이었다. 그가 미국인 이었다면 매스컴의 주목을 더 많이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73년 우승자가 입는 녹색 양복(그린 재킷)의 주인공은 4라운드 합계 5언더파 283타를 친 토미 애런이었다.

대회를 마친 나는 시카고를 거쳐 귀국길에 올랐다. 비행기 안에서 마스터스 대회를 꼼꼼하게 분석해봤다. 어느 대회에나 당당하게 출전했던 나였지만 주눅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소중한 경험을 간직하고 나는 다시 아시아 서키트로 돌아왔다.

한장상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