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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창립 10년 백두대간 대표 이광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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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스탤지어' '희생'(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 '천국보다 낯선'(짐 자무시), '화니와 알렉산더'(잉그마르 베리만), '줄과 짐'(프랑수아 트뤼포), '이레이저 헤드'(데이비드 린치)… 고급 영화팬을 자처하는 이라면 한두 번쯤은 보았을 작품들이다.

사실 이런 영화들을 일반 극장에서 필름으로 볼 수 있게 된 건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 1990년대 초만 해도 영화 교과서나 저널에서 거론되는 문제작을 접하려면 외국 문화원을 찾거나, 외국에서 어렵사리 입수해 수차례 복사를 거치는 과정에서 화질이 형편없어진 비디오테이프를 통하는 게 고작이었다.

이런 열악한 영화문화로부터 젊은 관객을 구해내는 데 기폭제 역할을 한 곳이 영화사 백두대간이었다. 백두대간은 이 글의 첫머리에 나열한 작품들뿐 아니라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를 시작으로 이란 영화를 국내에 처음 소개하는 등 지금까지 70여편의 명화들을 수입, 상영해왔다. 백두대간은 현재 예술영화 전용관인 시네큐브(서울 광화문)도 운영하고 있다.

내년 초에 창립 10주년을 맞는 백두대간의 대표인 이광모(43)감독을 만났다. 그가 98년에 만든 데뷔작 '아름다운 시절'은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 6.25 전쟁의 상처를 그린 작품으로 칸 등 유수의 국제영화제에 초청받았다.

*** 비디오 시장 침체 영향 커

-영화사를 차리게 된 동기는.

" 대학(고려대 영문과)을 졸업한 뒤 86년 미국으로 영화를 공부하러 가서 91년 귀국했다. 감독으로 데뷔하기 위해 '아름다운 시절'의 시나리오를 들고 여러 영화사의 문을 두드렸으나 한결같이 고개를 저었다. 상업성이 없다는 거였다. 왜 이런 상황이 됐을까 고민하다가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영화를 볼 줄 아는 관객층이 형성돼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게다가 내가 유학했던 미국 로스앤젤레스만 해도 훌륭한 영화들을 볼 수 있는 공간이 넉넉해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찾아볼 수 있었다. 한데 당시 한국은 그런 공간이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 좋은 영화들을 기껏 화질이 엉망인 비디오로 봐야 한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관객 육성도 하고, 돈을 벌어 영화도 찍을 요량으로 해외 영화제에 다니면서 영화를 구입하기 시작했다. 그게 93년 11월이었고 처음 사들인 영화가 '화니와 알렉산더'였다."

-10년 전과 지금의 예술영화 시장을 비교한다면.

"영화 산업 자체는 커지고 성장했지만 그 속에서 예술영화의 지위는 더 나빠졌다. 결정적인 요인은 비디오 시장이 죽었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는 예술영화라 해도 비디오가 평균 4천장은 팔렸다. 하지만 지금은 10편을 개봉하면 2편 정도만 비디오로 출시될 뿐이다. 그나마도 판매량이 8백개를 못 넘는다. 예술영화는 극장 입장료 수입과 비디오 판권료 수입이 절반씩을 차지한다. 그런데 비디오 판권료를 거의 못 받다 보니 수익이 절반 이상 준 셈이다. DVD가 있지 않냐고? 모르는 말씀이다. DVD 판매량도 5백개에서 8백개 사이다. 제작 원가를 겨우 건지는 수준이다. 그러니 마케팅이나 좋은 기획을 할 여력이 없다."

*** 지상파 방송의 외면도 문제

-TV에 팔리지 않나?

" KBS.MBC.SBS 등 지상파는 예술영화를 거의 사지 않는다. 할리우드나 한국영화만 구입한다. 백두대간이 1백편 가량의 영화를 수입했는데 여태껏 이들 지상파 방송에 팔린 건 단 3편뿐이다. EBS가 꾸준히 구입하지만 워낙 구입 단가가 낮아 수익에 별 도움이 안 되는 형편이다."

-제도나 정책적으로 할 말은 없나.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예술영화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예술영화와 저예산독립영화를 섞어서 생각하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 그 둘은 분명히 다르다. 저예산 독립영화는 미학적으로는 거칠지만 새롭고 도전적인 작품인 경우가 많다. 반면 예술영화는 완성도가 높고 고급 취향의 관객을 지향한다. 그런데 지금 영진위는 저예산 독립영화를 지원하는 데 더 무게를 두고 있다. 둘을 구분해 다른 방식으로 지원하지 않으면 둘 다 어정쩡해진다.

-예술영화 시장을 살리기 위해 가장 시급한 것은.

"관객 개발이다. 10년 전에 비해 예술영화 관객이 줄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늘지도 않았다. 답보 상태다. 예술영화 전용관 같은 상영공간만 늘린다고 능사가 아니다. 더 많은 관객이 예술영화에 관심을 갖도록 다양한 이벤트와 교육, 적극적인 마케팅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영진위가 지원을 늘리고 참신한 아이디어를 내놓아야 한다. 예술영화는 덜렁 영화만 틀어주는 차원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강의도 하고 평론가와의 대화나 동호인 모임, 책자 발간 등 입체적으로 끌고가야 한다."

*** 이산가족 다룬 차기작 준비

어려움 속에서도 이감독은 이산가족을 소재로 한 차기작을 위해 내년 초부터 본격적으로 움직일 계획이다. 그 자신이 이산가족의 집안 분위기에서 성장했기 때문인지 이 영화에 더 강한 애착과 책임감을 느끼는 듯했다. 백두산에서 지리산으로 내리뻗은 한반도의 등뼈 백두대간처럼, 그의 뚝심도 쭉쭉 뻗어가길 빈다.

글=이영기, 사진=임현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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