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개혁:하(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5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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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지주들 거센저항도 역부족/우익몰락 가속화/반공청년들 공산당 사무소등 습격·방화/「인민위」선 노동자선전대 조직/빈농에 “겁내지 말고 투쟁하라”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의 기습등장에 이은 전격적인 토지개혁은 북한내 우익세력 공동화를 가속화시켰다.
우익세력들은 우려해왔던 사회주의 색채가 토지개혁속에 명백히 드러났음에도 속수무책이었다.
당황한 우익세력은 북한을 한때 극심한 소요에 빠뜨릴 정도로 저항을 거듭했지만 결국 밀려나야 했다.
46년 1월말께 공산당 북조선 조직위원회의 5차확대집행위원회에서 제기됐던 토지개혁 방침은 2월20일께 조직위원회 상무위원회에서 법초안을 마련할 정도로 신속히 추진됐다. 물론 작업은 비밀리에 진행됐다.
○농민을 앞에 내세워
전북한 고위관리 서용규씨의 증언.
『토지개혁법령작성 기초위원회는 현지조사를 거친뒤 법령초안을 마련해서 46년 2월20일께 상무위원회에 넘겼습니다.
이때부터 약 1주일간 상무위는 토지개혁과 관련된 모든 사항들을 집중 검토했습니다.
법령초안뿐 아니라 개혁추진에 필요한 구체적인 후속조치도 신중히 검토되고 결정됐지요. 당연히 비밀리에 진행됐지요.
상무위원회는 2월27일 토지개혁법령안을 통과시켰고 46년 3월5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이름으로 공식 발표했습니다.』
법령은 1년여후인 47년 2월17일 인민대의기구인 북조선 도·시·군 인민위원회대회에서 정식법령으로 통과됐다. 46년 3월에는 대의기구가 없었기 때문에 이 법령은 발표와 함께 선시행·후법령통과의순을 밟았다.
토지개혁은 법령발표와 함께 곧 실천에 들어갔다.
지역마다 모든 지주와 농민이 참가하는 농민대회를 열어 해당 농민위원회가 작성한 토지대장에 따라 몰수 및 분배토지를 공식 발표하고 이어 농민위원회 위원들이 현지 실사와 함께 새 소유주에게 도인민위원회가 발행한 토지소유증서를 발급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토지개혁은 지역농민위원회가 실질적으로 담당했지만 지주와 농민들 사이에서 갈등이 흡수되도록 수혜자인 농민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러나 「지주는 상전」이라는 생각이 몸에 밴 농민들로 하여금 자기몫의 토지를 스스로 얻어내도록 유도하는 것은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서씨의 증언.
『상무위원회는 무엇보다도 지주와 소작인 관계에 묶여 살아오면서 지주를 두려운 사람으로만 생각하는 고정관념을 깨부술 필요가 있다고 봤습니다. 「땅을 빼앗는 두려움」을 없애고 「땅을 빼앗기는 자」들의 반발을 직접 상대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농민들의 관념을 바꾸는 방향의 선전사업이 우선되어야 했습니다. 이의 한 방법으로 북한 전역의 각 공장에서 뽑은 핵심노동자와 진보적 학생을 포함한 노동자 선전대를 조직했습니다. 이들은 각 지방 농민위원회로 파견돼 강연이나 개인접촉을 통해 토지개혁의 정당성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설득하고 다녔습니다.』
의식계몽과 토지개혁이 병행되는 가운데 많은 일화들이 양산됐다.
○멋대로 규정적용
서씨는 이런 에피소드를 전하고 있다.
『선전대는 농민들에게 「당신들이 농사의 주인이고 토지개혁의 주체다」라고 설득하는 한편 지주들에게 당했던 억울함을 집중적으로 강조했습니다. 그렇게 교육을 받고도 막상 현장에 나서면 지주가 뭐가 그렇게도 무서운지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그래도 옛날 상전인데…」 「언제는 지주에게 신세지고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고 등을 돌릴 수 있겠는가」라는 거예요.
지주집을 빼앗아 머슴출신에게 「당신의 집이니 그곳에서 살아라」하고 문패까지 달아줘도 못살겠다고 도망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지주를 강제로 이주시키는 일을 할때는 차마 그런 일은 못하겠다고 도망치기까지 했습니다.』
규정을 멋대로 적용해 무리를 빚는 일도 있었다.
당시 황해도 은율군 장암리에 살다 월남한 박내훈씨(59)는 5정보라는 규정에도 불구하고 농민위원회가 멋대로 토지를 몰수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때 우리집은 논 4천3백10평·밭 7천2백80평으로 5정보 이하를 소유하고 있었는데도 논 5백10평과 밭 6백평을 몰수당했습니다. 우리는 소작을 주지않은 자영농이었는데 땅이 많다는 이유로 몰수한 것입니다.
우리 마을에는 모두 70여호가 있었고 이중 5호정도가 우리와 비슷하게 5정보이하를 소유했는데도 토지를 일부 몰수당했습니다.』
○소군과 총격전도
무리가 따르기도 했고 땅을 빼앗는다는데 따른 농민들의 부담감이 일을 더디게 하기도 했지만 농민들은 자연스럽게 개혁에 합류했다.
그러나 「내 땅을 억울하게 빼앗긴다」고 생각하는 측은 달랐다.
사실상 날카로운 계급투쟁이라고 할 수 있는 저항들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땅을 빼앗기는 자」와 「빼앗는 자」들 사이의 투쟁은 사투에 가까울 수 밖에 없었다.
서씨의 증언.
『토지개혁이 시작되자마자 저항이 끊임없이 일어났습니다.
지주편에 선 반공청년 및 학생들의 농민위원회 사무실 습격,위원장테러,노동자선전대숙소 습격 방화,공산당의 면당·리당사무소 및 면인민위원회에 대한 습격 방화 등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이미 월남한 사람들이 배를 이용하거나 산을 타고 38선을 넘어와서 테러를 하거나 조직적으로 토지개혁 반대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심한 곳에서는 저항세력들이 일본군이 버리고 간 무기를 구해 소련군과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공산당원이나 빈농들은 학생출신이나 반공청년들을 지주나 부유층 자제들로 생각했기 때문에 증오심을 갖고 있어 투쟁이 격렬한 양상을 띨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공산당 지도부도 토지개혁이 계급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을 의식하고 있어서 농민들의 그같은 생각을 부추겼고 과격한 투쟁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저항이 심했던 지역으로는 황해도 재령·안악,평남 순천,평북 정주·용천,함남 고원·함주,강원 안변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남한과 연결된 저항운동은 4∼5월까지도 심했습니다.』
저항대신 월남의 길을 택하는 인파들이 꼬리를 물었다. 전 북한 고위당원인 김모씨(중국 거주)의 증언.
『토지개혁후 평남도당 산업분과위에서 토지개혁을 전후한 인구통계를 작성한 일이 있습니다.
이때 월남한 인구가 약 1백만명 정도라는 계산을 했습니다.
임시인민위 상업국 한 간부는 토지개혁이 발표되자 자기가 갖고 있는 발동선에 가족을 싣고 있는 대동강을 통해 달아나는 일도 있었습니다.』
46년 3월초 시작된 작업은 월말께 대체적으로 마무리됐다.
토지개혁으로 4만여명의 지주들은 몰락하고 약 72만호의 농가가 실질적인 수혜자가 됐다(강정구 『좌절된 사회혁명』).
월남인파의 급격한 증가와 북한 공산당에 의한 수혜자의 대거 등장은 북한내 반공세력의 공동화와 공산세력의 기반강화라는 정치적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토지개혁으로 북한의 반공세력은 부분적인 저항을 제외하면 급속한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이제 북한내에 공산당에 반대할 세력은 없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토지개혁의 완료는 북한이 사회주의에로의 돌이킬 수 없는 길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특별취재반
북한부
김국후 차장
안희창 기자
유영구 기자
안성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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