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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양욱목사집 폭탄투척사건(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46)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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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증언자 최의호씨/한밤에 수류탄… 아들·딸만 폭사/임정정치공작대 주도 「4인조」 침투/치스차코프집에도 의문의 폭탄/불길속 창문뛰쳐나와 “구사일생”
「3·1절 기념행사장에서의 김일성 암살」에 실패한 서울의 임정 정치공작대원 김정의·최기성 등은 실의를 딛고 권총과 수류탄을 준비해 최용건·김책·강양욱 등 요인 제거에 나섰다.
이들은 3월4일 자정을 기해 북조선 보안책임자 최용건집(평양시 리향리 66)을 습격했다.
그러나 김일성 피습사건이후 최용건의 집도 경비가 강화되어 집안으로 깊숙히 들어갈 수 없었다.
담밖에서 침실로 짐작되는 방을 향해 수류탄 한발을 던지고 권총 수발을 쏜후 정치공작대 평양시내 연락처인 정치공작대 조직반장 조중서씨의 매부 차상빈씨집으로 피신했었다.
이어 이들은 3월7일 밤 김책집을 습격했으나 역시 삼엄한 경비때문에 깊숙히 접근하지 못해 골목길 멀리서 집안정원에 수류탄 한발을 던지고 달아나는데 그쳤다.
소군정 특무대원들과 임시인민위 보안서원들은 연일 요인들의 사택에 수류탄등을 투척하고 달아난 정체불명의 테러단검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최용건·김책집 습격
김정의는 계속된 실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최기성·이성열외에 평양의 의혈학생 최의호(당시 21세·평양공전 재학)·이희주(19) 등 2명을 규합,북조선임시인민위 서기장 강양욱목사의 암살계획을 세웠다.
강양욱은 김일성의 외조부 강돈욱의 6촌동생. 한때 강돈욱이 설립한 창덕학교에서 김일성을 가르쳤고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개신교 목사로 일하다 해방과 함께 붉은 군대를 만났다. 그는 조만식을 제거하는데 큰 역할을 했고 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 서기장에 선출돼있었다. 그는 목사였지만 개신교의 반동조직 파괴 투쟁에 앞장서고 있었다.
「강양욱암살 4인조」의 한사람이었던 최의호씨(67·서울 온수동 45의 32)의 회고.
『계속된 실패로 우리는 독이 오를대로 올라 있었지요. 그래서 이 계획만은 상당히 치밀하게 세웠습니다. 거사 계획은 강양욱의 집이 가까운 나의 자취방(덕산의원 2층)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강의 집 동향을 그의 집 건너편 언덕에 살고 있는 나의 친구 김재용(평양상업학교 재학)이 살펴 주었습니다.
3월12일 0시 이성렬 최기성·이희주 등 3명은 권총을,나는 수류탄을 휴대해 강의 집 주변에 도착했습니다. 주위 담벼락응달에는 아직 잔설이 남아 있었고 음력 보름이 가까운 상현달이 매우 밝았습니다. 10여분동안 집주변을 살펴보았으나 강의 전용 승용차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강이 이날 귀가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결행을 다음날로 연기하기로 하고 병원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음날인 3월12일 저녁 4명은 다시 덕산의원에 재집결했다.
최의호씨의 회고는 계속된다.
『13일 0시 우리는 병원문을 나서 강의 집 부근에 도착했습니다. 마침 강의 승용차가 집앞에 주차되어 있더군요. 집 주변을 살펴보니 동남향의 ㄱ자 집 뜰 앞둘레의 담은 3푼송판이 여섯자 높이로 둘러져 있고 동쪽으로 세자폭으로 송판 쪽문이,안으로 철사 고리가 걸려져 있더군요. 내가 한 사람의 어깨에 올라서서 허리를 굽혀 안에 걸려 있는 고리를 딴후 모두 뜰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안채로 보이는 동향은 불이 훤히 켜져 있었고 남향은 작은 방 두칸인데 한쪽방은 불이 켜져 있었지만 다른 방은 불이 꺼져 있었습니다. 안채 큰방에는 광목으로 된 커튼이 걸려 있어 방안이 들여다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안채 큰방에 강의 부부가 자고 있을 것으로 추정,내가 수류탄을 던지면 최기성과 이희주가 권총으로 사격하고 권총을 소지한 이성렬은 남향 작은 방을 맡기로 했습니다. 내가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아 방안에 던지자 세사람도 동시에 권총을 퍼부었습니다. 수류탄이 쾅하고 폭발하더군요. 수류탄은 방 문턱안 아래서 터졌기 때문에 밖으로 파편 한조각 튕겨 나오지 않아 우리는 한 사람도 부상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성공이다. 철수하자」고 외쳐 우리 모두 현장을 빠져 나왔지요. 병원에 도착한 우리는 「완벽한 성공」이라며 흥분을 가라 앉히고 있었습니다.
○목사 한명도 숨져
몇시간 후 병원마당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 오더군요. 병원은 무장한 보안서원들에게 포위되어 있었어요. 권총을 든 최기성등 세사람이 일제히 밖을 향해 사격을 퍼부었습니다. 그리고 창문을 열어 이웃 여인숙 등으로 도망치면서 총격전을 벌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최기성은 현장에서 사살되고 이희주는 얼굴 아래턱에 총상을 입고 보안서원들에게 잡혔어요.
현장을 빠져나온 나와 이성렬은 친척집등에서 피신하다 3월20일께 제각기 월남했습니다.
13일 오전 평양시내에는 「간밤에 테러단들이 강양욱집을 습격해 수류탄과 권총사격을 퍼부어 강의 일가족을 몰살하고 달아났다」는 소문이 퍼졌다.
3·1절 김일성암살미수사건의 주역중 한사람이었던 조재국은 이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강양욱의 집이었던 고정교회로 달려갔다.
조씨의 증언.
『현장의 경비병들에게 물어보니 강양욱은 얼굴 양쪽에 총알이 스쳐간 경상을 입고 그의 장남 영해(당시 20세·평양공전 재학중)와 여중생 딸,그리고 영해군의 중매건으로 찾아왔다가 함께 잠을 잤던 김득호목사 등 3명이 현장에서 죽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함께 잤던 강병석목사는 척추에 수류탄파편을 맞아 병원으로 실려갔다고 말하더군요.』
한편 강양욱집 습격사건이 발생한지 2∼3일후,평양주둔 소련군 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의 관사에서 종류를 알 수 없는 폭탄이 폭발,인명피해는 없었으나 소군정 지도부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치스차코프는 훗날 자신의 회고록(76년 소련과학아카데미 동방학연구소 발행 『조선의 해방』)에서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나는 46년 3월1일 평양역광장에서 있은 기념행사에 참석했다가 테러리스트들이 주석단에 투척한 수류탄때문에 대단히 놀랐습니다. 다행히 피해를 보지 않았으나 재앙이 나를 가만히 버려두지 않았지요.
○일본 포로가 설치
보름후로 기억합니다. 임신중에 있던 나의 아내는 모스크바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나와 함께 2층에서 잠을 자다 이상한 물체가 타는 냄새를 맡고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즉시 나를 깨우더군요. 방문을 열어 보니 2층으로 올라오는 계단이 화염에 휩싸여 있음을 발견,문을 닫고 「불이다,사람 살려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마루와 천장이 니스로 칠해져 있어 불길은 삽시간에 온 집을 휩싸 버렸습니다. 방안에 시커먼 연기와 불길이 밀려 오자 우리부부는 그만 불에 타 죽는 줄 알았습니다. 창문을 통해 탈출하려고 했으나 높이가 10여m나 되어 여의치 않았습니다. 우리 부부는 계속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구출을 요청했습니다. 방이 타기 시작할 때 구조대원들이 사다리를 갖고 와 창문에 걸쳐 줘 구사일생으로 구출됐습니다.』
치스차코프장군은 『구조대 출동이 2분만 늦었더라도 우리부부는 불에 타 죽었을 것』이라며 이 사건의 배경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서울에서 개최되는 소­미 공동위 소련측 수석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평양에 온 스티코프장군이 이날 오후 이 사건을 조사해 보고하더군요. 그는 「화재가 일어나던날 일본 포로가 수도관을 수리하면서 1층 계단 부근에 종류를 알 수 없는 폭탄을 장치해 놓았다」며 「그러나 그 일본포로의 배후는 누구인지 정확히 드러나지 않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후 특무대와 보안대에서 수사를 계속했지만 내가 국방성으로부터 전출명령을 받고 평양을 떠나던 47년 3월말까지 배후를 정확히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특별취재반
북한부
김국후 차장
안희창기자
유영구기자
안성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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