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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태생 쉬퇴거 수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나병환자들의 어머니」마리안네 쉬퇴거 수녀(58). 나병 환자들의 고단한 몸과 마음을 어루만지는데 일생을 바쳐온 그의 삶은 음지의 섬 소록도에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처럼 피어있다.
30년간 마르지 않는 사람의 샘물을 쏟아 부어 온 그의 따뜻한 영혼은 그를 대하는 모두에게 좀처럼 접하기 힘든 편안함과 뿌듯함을 맛보게 한다.
오스트리아의 산악도시 인스부르크에서 가난한 농부의 7남매 중 세 번째로 태어난 그가 낯선 땅 한국에, 그것도 「천형의 섬」소록도에 삶의 닻을 내린 것은 28세 때인 62년. 그는 한국에 오기 전 인스부르크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이 대학부속병원의 간호사로 7년간 일하면서 수녀의 길을 함께 걸어왔다.
자신의 삶을 불우한 사람들을 위한 도구로 내놓겠다는 그의 생각은 오스트리아 천주교 부인회의 해외봉사계획에 참가함으로써 구체화됐다. 그는 이를 「하늘의 뜻」이라고 믿고 있어 자신의 삶에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거나 호기심 어린 주변의 관심을 매우 부담스럽게 생각한다.
『「주는 자는 더 많이 받을 것」이라는 하느님의 말씀처럼 내가 하는 일은 오히려 나에게 더 많은 기쁨을 주기 때문에 나의 간절한 소망이기도 하다』는 것이 그의 담담한 표현이다.
남해안의 고흥반도에서 손에 닿을 듯 가까우면서도 천길 만길 소외돼 있었던 소록도에 그가 처음 다다랐을 때 섬에 버려져 갇혀 지내는 5천여 환자들의 생활은 처참했다. 그들의 상처는 손을 대기 힘들 정도로 심한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환자들의 생활은 궁핍하기 짝이 없었다.
환자들은 섬 안에서조차 그들을 돌보는 직원 가족들과 철책으로 분리돼 세상을 원망하며 죽기만을 기다리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나병이라고는 전혀 없었던 오스트리아에서 온 그에게 이런 현지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 그를 이곳에 보낸 하늘의 큰 뜻에 감사했고 자신이 도움이 될 수 있음에 온몸이 전율하는 기쁨을 느꼈다는 것.
맨 처음 그에게 주어진 일은 나환자들의 미감아 자녀를 돌보는 일이었다. 그는 애초 3년 예정으로 한국에 보내졌지만 임무를 마치고 그가 향한 곳은 고국이 아니라 인도의 나환자 촌이었다. 그는 보다 본격적으로 나환자를 돕기 위해서는 나병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당시 나환자가 많기로 유명한 인도 마드라스 근교의 나환자촌에서 6개월간 나병의 치료방법 등에 대한 본격적인 수업을 받고 66년 소록도로 되돌아왔다.
나환자들은 그의 접근에 처음에는 강한 반발을 나타냈다. 같은 민족에 돌팔매로 쫓기고 가족까지도 쉬쉬하며 외면하는 처지에 푸른 눈에 금발을 한 외국인이 도대체 무엇을 도와주겠느냐며 외면했다.
어떤 환자들은 유리병을 깨뜨려 씹는 자해행위로 그의 접근을 완강히 막았다. 그러나 그는 끊임없이 마음을 다해 헌신했다. 거짓 없는 사랑에 환자들이 감격해 눈물을 쏟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7개 부락에 나뉘어 사는 나환자를 치료하기 외해 길이 없던 소록도의 산을 타고 다니면서 정성을 기울였고 말이 통하지 않아 손짓 발짓으로 환자들에게 위안과 힘을 주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는 환자들을 대하면서 마스크나 장갑을 착용하지 않았고 손으로 직접 깊은 흉터의 고름을 짜내 환자들은 물론 한국인 직원들을 놀라게 했다.
오스트리아 가톨릭 부녀회에서 월급으로 받은 적은 돈을 모으고, 오스트리아 부녀회의 도움도 받아 환자들을 위한 목욕탕도 곳곳에 설치했는가 하면 정서생활에 도움이 되는 동물사육장을 설치했고 영양상태가 부실한 환자들을 위해 우유를 구입해 무료로 나눠주기도 했다.
육지로 새 삶을 떠난 환자의 자녀들을 위해서는 학비지원도 서슴지 않았고 손가락이나 발가락이 없어진 환자들에게 맞는 양말이나 장갑을 뜨며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그는 온몸이 일그러진 환자들을 자신의 처소로 초대해 손수 만든 음식을 함께 나누어먹기를 즐겨한다.
환자들이 초대하면 기꺼이 그들의 집을 방문해 고민에 귀를 기울이며 동정이 아닌 우정을 나누어왔다.
한해가 10년이 되고 다시 30년이 됐어도 소록도를 벗어나는 여행조차 하지 않는 그의 삶에 감동한 많은 사람들이나 기관에서 포상할 것을 여러 번 제의해 왔으나 그는 번번이 사양해 왔다. 그는 자신의 일이 인간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며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 환자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고집해 왔다.
오스트리아 정부에서도 그에게 포상을 하려고 그의 귀국길을 주선했으나 그의 강경한 반대에 부닥쳐 결국 주한 오스트리아 대사가 소록도를 방문해 본국 정부의 뜻을 전하는데 그쳐야 했다. 83년 우리 정부가 포상으로 내려보낸 자동차도 그는 소록도 병원측이 공용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내놓았다.
지난달 24일로 소록도 생활 30년을 맞는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보사부에서 훈장 상신을 하겠다는 의사를 전했으나 꽃다발 하나만을 전달하는 것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고 관계 공무원은 전했다.
나병 환자 및 환자가족, 병원 직원 가족 등 1천9백여 명이 살고 있는 소록도는 이체 더 이상「버려진 섬」이 아니다.
전라도 사투리가 물씬 배어있는 한국말을 유창하게 구사하는 쉬퇴거 수녀의 사랑이 바깥세상으로부터의 소외감보다 더욱 진하기 때문이다. <글·사진=고혜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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