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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바꾼 리더십 ② 이옥식 서울 한가람고 교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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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6일 서울 양천구 목동에 있는 한가람고의 물리Ⅱ 시간. 고3 학생 7명이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을 놓고 토론하고 있다. 이석준(18)군은 "물리Ⅱ를 꼭 배우고 싶어 선택했다"며 "학생 수가 적으니까 심도 있게 배울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학생 7명이 선택하는 과목은 일반계 고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20명은 넘어야 교사가 배정된다. 수업은 교사.학교 위주로 짜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이 학교에서는 학생이 최우선이다. 학생이 선택하면 학생 수와 관계없이 과목을 개설한다. 가르칠 교사가 없으면 외부에서 초빙이라도 한다.

이 학교 학생들은 대학생이 수강 신청하듯 자기가 배우고 싶은 과목을 골라 시간표를 짠다. 그러다 보니 고3의 경우 모두 41가지의 시간표별로 학생 그룹이 나뉜다. 이들은 자신의 시간표에 맞춰 교실을 옮겨다니면서 공부한다. 고2는 더 복잡하다. 시간표의 조합이 77가지나 된다.

이런 복잡한 시간표를 만든 사람은 이옥식(48) 교장이다. 만 10년 교장을 맡고 있다. 그는 "시간표 만드는 게 복잡한 수학 문제 푸는 것 같다"며 "그래도 학교는 학생을 위해 있는 것이라는 신념으로 학생이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게 해준다"고 말했다. 1997년 개교 이후 한가람고가 벌여온 교육 실험의 중심엔 이 교장이 있다. 이 교장의 리더십에는 국내 최초라는 수식어가 자주 따라붙는다. 국내 최초의 교사 평가 실시, 국내 최초 전체 과목 이동수업 실시, 국내 최초 반바지 여름 교복 도입 등. 이 교장의 실험은 진학률로 나타난다. 올해는 서울대 합격자가 10명이 나왔다.

?기피 학교에서 선호 학교로=이 교장은 94년부터 양천구 신정동 영등포여상 교장을 맡아왔다. 이때부터 아이들이 가고 싶은 학교를 만들 수 없을까를 놓고 고민하다 이봉덕 재단 이사장을 설득했다. 이 교장은 "문.이과 구분을 깨고 교과목 선택권을 학생들에게 주는 학교를 만들겠다"고 구상을 털어놓았다. 재단이 움직였다. 영등포여상 학교 건물 한 편에서 일반고인 한가람고가 새로 문을 연 것이다.

개교 첫해 이 학교로 배정된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난리를 쳤다. 신설학교, 그것도 여상 건물을 쓰는 학교에 보낼 수 없다는 이유였다. 이때 이 교장은 정공법을 택했다. 학교 설명회를 개최한 것이다. "학생 중심의 시스템이면 대입에서도 성공할 수 있다. 학교를 믿고 2개월만 보내 달라"고 호소했다.

그런 뒤 개교 첫해부터 학생들을 대상으로 '수업 만족도 조사'를 했다. 학생들이 학기 말에 '선생님이 수업에 열심히 임하시나요(0~4점)' '평가 방식은 공정한가요(0~4점)' 등 8개 문항에 대해 점수를 매긴 것이다. 평가 결과는 각 교사들에게 통보됐다. 백성호(44) 교감은 "그때나 지금이나 어느 학교도 도입할 수 없는 혁명적인 평가 방법이었다"고 말했다. 수업만족도 방식의 교사 평가는 10년간 이어져 오고 있다.

2000년 목동으로 이전한 학교 건물도 이 교장이 직접 설계했다. 교실 천장을 높이고 채광을 고려해 아늑한 느낌이 들도록 만든 것도 이 교장의 아이디어다. 이러는 사이 한가람고는 누구나 가길 원하는 학교로 변신했다. 고3 김도연 양은 "다른 지역에 사는 사촌도 오고 싶어하는 학교"라고 자랑했다.

?학생 중심 운영의 결실=이 학교의 대입 성적은 갈수록 좋아지고 있다. 2000년 서울대 합격자가 2명에 불과했는데 올해엔 10명이었다. 지난해 수능에서는 전국 수석도 나왔다. 지난달 발표된 2008학년도 수능 모의고사에서는 언어.수리.외국어 영역에서 모두 1등급을 받은 학생이 12명(전교생의 4%)이었다. 전체 수험생 평균(1%) 보다 4배 높은 것이다.

이 교장은 교사 운영 시스템도 바꿨다. 모든 교사들의 연구실을 각 교실에 전진배치했다. 그곳에서 공부하고, 자료를 만들며 해당 교과 수업시간에 맞춰 교실로 찾아오는 학생을 맞도록 했다. 주상돈(33) 교사는 "다른 학교는 학급 위주로 운영되지만 우리는 교과 위주로 한다"며 "교과 위주 운영은 학생들의 학업 성과를 끌어올리려는 이 교장의 의지"라고 말했다.

강홍준 기자 <kanghj@joongang.co.kr>
사진=변선구 기자 <sunnine@joongang.co.kr>

이옥식 교장은 …

홍익대 수학교육과를 나와 1980년 3월 영등포여상 수학교사로 교직에 첫발을 내디뎠다. 94년 영등포여상 교장을 거쳐 97년 한가람고 개교 때부터 교장을 맡았다. 2002년 목동으로 학교를 옮기면서 학생들의 자유로운 교과 선택.이동 수업이 가능하도록 학교 건물을 직접 설계했다. "학교는 학생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 그의 교육철학이다. 전국 최초의 교사 평가제와 학생의 교과 선택 보장은 이런 철학에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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