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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약으로 마약중독자 치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한약을 이용한 마약중독치료제 개발에 평생을 바친 끝에 최근 그 결실을 보게된 민속의학자 권재우씨(61·경남산청군단성면성내리264의2)-.
그가 「골인」이라는 치료제를 개발, 국내유수 의대는 물론 미국·이스라엘등의 마약중독자 치료센터에서까지 그 효능을 인정받기 위해 바쳐온 40여년은 「개발중독증」에 걸리지 않고서는 헤쳐나가기 힘든 험로였다.
몇차례 병마와 싸우다 한번은 독약을 잘못 처방해 먹고 죽음의 문턱까지 간 일도 있었다.
권씨 자신이 아편에 중독돼 이를 고치려 마약중독 치료제개발에 매달린 동기자체가 심상치 않은 앞날을 예고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50년 6·25전쟁이 터지기 직전 축농증수술등의 후유증으로 관절신경통이 계속되자 권씨는 진통목적으로 아편을 입에 대기 시작, 급기야 중독자가 되고 말았다.
이때 대구에서 「광명당」이라는 한의원을 운영하며 이름을 날리던 선친 권기만옹(작고)이 『동의보감』등 한의서의 마약중독치료법에 따라 부자를 주성분으로 하는 한약을 처방해주었고, 이를 복용한 권씨는 10여일만에 중독증이 치료됐다.
선친의 한의원에서 견습중이던 권씨는 자신의 마약중독증을 말끔히 없애준 부자의 놀라운 효과에 반해 자신이 마약중독치료약을 개발해 보겠다고 마음먹었다.
『의서에 인삼·녹용은 선약이고, 부자는 난치병약이며 약의 군왕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한의사들은 보통 부자를 다스릴줄 알아야 진짜 명의라고 합니다. 이는 부자의 독성이 매우 강해 잘못 처방하면 환자를 고치기는커녕 오히려 생명을 앗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만해도 6·25전쟁중이라 인심도 흉흉하고, 변변한 진통제도 없어 아편중독자가 흔해 「실험대상」은 충분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권씨는 부친의 방식대로 마약중독치료약을 지어 환자에게 복용시켜 봤지만 효과가 없을때도 많았다.
『과학적인 접근을 해야만 치료효율이 높은 약을 개발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그때 개를 대상으로 실험을 했지요.』
결국 3년여에 걸친 개실험끝에 치료제가 제대로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부자를 「무독화」시키고 여기에 유황을 첨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됐다.
그후 6백여명의 아편중독자를 성공적으로 치료한 권씨는 이에 용기를 얻어 골인을 상품화하기 위해 대구시립병원·서울대병원등에서 임상실험을 시도했다.
이때 첫번째 시련이 닥쳐왔다.
『66년 서울대법원 정신과의 남모과장님을 찾아갔을 때입니다. 선친의 친구이던 이효상씨(전국회의장)의 소개로 남박사를 만났는데 한약으로 마약중독을 치료할 수 있다고 하자 아예 대답도 없이 돌아앉는 것이었습니다.』
권씨는 남박사와 첫대면에 낙담했지만 서울역앞에 여관방을 잡아놓고 여섯차례가량 더 남박사를 찾아 임상실험을 읍소했다. 그러나 도저히 설득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권씨는 보사부로 방향을 틀었다.
수차례에 걸친 권씨의 탄원끝에 보사부는 골인의 임상실험에 관한 공청회를 개최하고 서울시경의 협조를 얻어 1백8명의 마약중독자를 검거, 서울대병원에서 임상치료토록했다.
골인의 임상실험 결과는 훌륭한 것이었다. 당시 직접 실험을 맡은 김광일교수(현한양대의대 신경정신과)는 『흔미·환각등의 마약중독현상을 치료하는데 당시 가장 훌륭했던 치료제라는 「클로프로마진」보다 2배이상 효과가 었었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약리작용등에 대해 더 밝혀야할 부분이 있었다』고 말했다.
보사부의 공청회·임시조치법제정·시경의 협조등을 얻는데 권씨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돈인 4천만원을 들여야 했다. 『이때문에 당시 인수한지 얼마 안되는 서상일 제헌의원집을 다시 팔았습니다. 이집은 당시 대구에서는 열손가락안에 드는 대저택이었지요.』
그러나 서울대병원의 성공적인 임상결과에 힘입어 돈은 아깝지 않았다고 권씨는 회상하다.
제약회사를 인수·창설하며 골인 상품화에 부푼 꿈을 꾸던 권씨는 그러나 지병인 협십증이 도져 결정적인 순간에 이를 포기해야만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맞았다.
79년에 협심증이 호전되면서 다시 연구를 재개한 권씨는 또한번 시련을 당했다. 마약중독치료제와 병행 연구하던 비상이 함유된 암치료제를 임상실험키위해 자신이 직접 복용했으나 비상의 무독화에 실패, 반신불수로 수개월을 다시 식물인간처럼 살아야했다.
그러나 권씨는 끈질긴 투병의지로 다시 일어서 골인의 상품화를 위한 임상실험자료를 얻기위해 경북대 의대팀에 다시 접촉을 시도했지만 이때는 가족의 반대라는 벽에 부닥쳤다. 『집사람과 아이들이 제 친구나 친지에게 돈을 대주지 말라고 부탁을 해놨더군요. 제가 반쯤은 미친 사람이라는 이유를 달아서….』
그러나 어렵사리 당시 경북대의대 이시형박사(현 고려병원장)에게 임상실험을 부탁한 권씨는 『마약중독치료제로 뚜렷한 효과가 있다』는 통지를 받고서 자신감을 회복했다.
독성실험자료·임상실험자료등을 꾸준히 축적해나가는 중에도 권씨는 가족들의 포기종용을 수없이 받았다.
『대학원까지 나온 며느리가 어느날 제게 와서 「동네사람들이 아버님이 미쳤다」고 하더라고 전하더군요.』
가족들의 반대가 누그러지면서 권씨가 골인의 상품화에 박차를 가하게 된 계기는 88년 서울올림픽.
『당시 가족을 포함한 동네사람들과 우리나라가 금메달을 몇개나 딸지 내기했지요. 우리의 국운이 융성하던때라 미·소등에 이어 4위는 해야겠는데, 역대 올림픽기록을 보니 12개쫌은 획득해야 하겠더군요.』
올림픽의 결과는 권씨의 예측과 딱 맞아떨어지고 이를 계기로 아들·며느리등이 『아버님은 뭔가 신통력이 있는 분』이라며 신뢰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정규교육을 받은 한의사인 둘째 아들이 본격적으로 권씨를 돕기 시작, 89년 미국 LA의 찰스 앤드루 마약센터등에 골인을 보내 5명의 코카인 중독자와 4명의 헤로인중독자를 완치시졌다는 회신을 받았다.
이스라엘마약센터도 같은해 골인의 치료효과를 인정, 권씨는 계속해서 이 약을 공급중이며 파키스탄과는 지난7월 공급계약을 체결했다.
권씨는 세계보건기구(WHO)에 올해안으로 지금까지의 임상실험결과등을 종합 보고하고 유엔가입 1백60여개국가에 무료로 골인을 우송할 계획이다.
아들만 넷을 둔 권씨는 『특히 아버지가 개발한 마약중독치료제에 회의감을 표하던 셋째 주현(서울대통계과졸)이가 회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아버지의 사업을 돕게돼 기쁘다』고 말했다. <김창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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