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힘 공백 틈 타 중동 영향력 되찾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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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푸틴(사진) 러시아 대통령이 11일부터 사흘간 사우디아라비아.카타르.요르단 등 3개국 방문에 나섰다. 러시아 대통령이 중동의 전통적인 친미.친서방 국가로 꼽히는 이들 나라를 방문하기는 처음이다. 이 지역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높이려는 목적에서다. 특히 이번 방문은 미국이 이라크전 이후 중동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가운데 이뤄지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중동에서 러시아 몫 찾는다=영국 BBC방송은 "러시아는 이번 방문이 아랍과의 새로운 경제.정치.군사 관계를 정립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일부 전문가는 "러시아 재래식.첨단 무기의 잠재적 시장 개척이 주요 목적"이라고 분석했다. 냉전 시절 소련과 아랍의 관계는 긴밀했지만 공산주의 정권 붕괴 이후 이 지역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은 급속히 약화됐다. 그러나 러시아가 고유가에 힘입어 다시 힘을 비축하면서 중동과의 관계 개선에 적극 나서고 있다. 2005년에는 적대국이었던 이스라엘을 방문하기도 했으며 이란에서는 현재 원자력발전소를 건설 중이다.

◆에너지.군사 협력 강화=푸틴 대통령의 11일 사우디 국빈 방문에는 고위 관리와 재계 인사가 대거 수행했다. 빅토르 코우드리아브체프 주사우디 러시아 대사는 "이중과세 방지.항공 등 5개 분야에 걸친 협력협정에 서명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다우존스가 10일 전했다.

세계 최대 석유 수출국인 사우디와 비 석유수출국기구(OPEC) 국가 중 최대 산유국인 러시아 간 교역은 현재 3억 달러 수준에 그치고 있지만 앞으로는 크게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고 다우존스는 전망했다. 군수물자 수입을 미국에 의존했던 사우디는 지난해 처음으로 러시아 육군의 주력 전차인 T-90과 Mi-17 헬기 구입 문제를 거론한 바 있다. 러시아 석유회사 루코일은 사우디 천연가스 탐사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푸틴이 12일 방문하는 카타르는 러시아와 이란 다음으로 천연가스 매장량이 많은 나라다. 푸틴은 카타르와 천연가스 생산국으로서 공동 이익을 증진하는 방안을 논의할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 방문국인 요르단은 이집트를 제외하고는 아랍권에서 유일하게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체결한 나라다.

◆미국 몰아붙이는 푸틴=미국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푸틴 대통령은 중동으로 떠나기에 앞서 뮌헨 국제안보회의에서 미국을 다시 한번 몰아붙였다. 푸틴 대통령은 "미국은 경제.정치.인권 등 전방위적으로 국경을 넘어 다른 국가에 자신의 입장을 강요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는 이어 "미국이 지배하는 단극 체제의 세계는 실제로 권력과 힘.의사결정의 중심이 하나이고 지배자와 주권도 하나라는 것을 의미한다"며 "이런 상황은 지극히 위험하고 누구도 국제법 뒤에서 피난처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느끼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한경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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