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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64)|<제85화>나의 친구 김영주(49)-김영주와 마지막 작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4월30일 아침 일찍 우리들은 수용소를 나섰다. 상해 제2부두에는 두 척의 수송선이 대기하고있었고 수송선을 향해 난민들은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한 척은 조선사람들을 태우고 부산으로 갈 배였고, 다른 한 척은 일본인을 태우고 일본 어디론가 간다는 것이다.
젊은 사람 10명씩이 승선수속을 돕기 위해 차출되었는데 우리 일행 4명도 지명되었다. 우리는 먼저 배에 올라 여러가지 표지판과 칸막이 설치를 끝낸 후 난민대열이 길게 뻗어 있는 부두광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12시쯤 승선 명령이 내려졌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일본인들은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순서대로 배에 으르고 있는데 조선인 대열은 마치 배에서 일평생을 살 것처럼 먼저 타겠다고 아우성이었다. 엉망진창인 우려대열을 내려다 본 수송관 미군소위는 『갓댐, 갓댐』을 연발했다. 내 얼굴이 화끈해졌다. 이 훈련 없는 백성들아, 도대체 어쩌자는 것이냐.
나는 솔직히 우리 독립은 아직 요원하다고 탄식했다. 저 혼란은 국민성·민도·질서의식·공중도덕 등 여러 가지가 포함된 형상일 것이다. 병자호란 때도, 임진왜란 때도 틀림없이 저 모양이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47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우리들의 그것은 조금도 변함이 없다고 나는 단정한다. 오죽 답답하면 뜻있는 사람들이 민족개량이니, 종자 개신이니 하는 말을 했겠는가.
석양녘에 고동소리 하나 없이 귀국선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구하나 전송해 주는 사람 없는 고요한 중국대륙과의 석별이었다.
배에는 여러 계층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대륙이 제2의 고향인 사람들은 두고 온 정과 재산에 탄식을 성토했고, 중경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정객들은 자기들 먼저 비행기를 타고 귀국해 버린 김구 일행을 열심히 성토하고 있었다. 짐짝은 식구끼리 둘러앉은 울타리가 되었고 우는 아이, 잠자는 아기, 코고는 노인, 떠들썩한 아낙네들의 그렇고 그런 모습들은 초라하고 슬프고 버림받은 한 민족이 어디론가 강제로 철거 당해 가는 것 같은 낙조, 그것이었다.
그러나 이 난잡한 틈바구니 속에서도 시끌시끌한 음악이 있었고 술에 취한 젊은이들은 기성을 내지르며 궁둥이를 마구 흔들어댔다. 아까 승선할 때 엉망이된 우리 대열은 저 흔들어대는 궁둥이와 똑같은 것이었다.
나는 갑판 위로 올라갔다. 대륙쪽을 바라보니 이제는 한 점의 불빛도 보이지 않는다. 갈매기는 밤에도 날으는지 슬피 울면서 계속 배를 따라오고 있었다. 대륙이여 안녕, 안녕. 이대로만 가면조선이다.
3일 후 우리 일행은 부산을 거쳐 서울 집에 도착했다. 나와 같이 온 세 사람은 모두 이북이 고향이었다. 김영주·문기찬은 평양이고, 박창수는 신의주. 서울이 처음인 그들은 1주일 정도 우리 집네 묵으면서 서울 구경을 한 다음 고향에 갈 예정이었다.
창경원 동물원을 시작으로 덕수궁·남산·옛 총독부·남대문 등을 두루 구경했다. 김영주가 서대문형무소에 꼭 가봐야 한다기에 이유를 물었더니 자기 막네 숙부(김형권)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사했다는 것이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자기가 7세때인 27년 풍산·홍원 등지에서 무장그룹으로 활동하다가 체포, 처형됐다는 것이다. 그 비보를 전해들은 날 밤 할머니 울음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며 그날을 잘 기억하고있었다. 옛 풍산군은 지금은 김형권군으로 되어있다.
「미소 공동위원회」가 무기한 후회로 들어가던 날 그들은 평양으로 떠나갔다. 5월6일이었다. 그때 평양 김일성 관저에는 고바야시(소림화자·33세?)라는 일본인 식모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후일 일본에 돌아가서 『해외동포귀국기록』(1970년 매일신문사간항·오촌방태낭편)을 발표했다.
그 한 구절에 「5월초 내가 일하고 있던 김일성 총리 관저에 한 청년이 찾아왔다. 어찌나 일본말을 잘 하는지 나는 그를 일본사람으로 착각했다. 그런데 그가 바로 김일성 총리 친동생이라는 것을 알고 더욱 놀랐다.』
그녀의 수기에는 그냥 「5월초」로 돼 있으나 그가 시울을 떠난 것이 5월6일이었으니 그날은 아마 5월7일일 것이다.
북한전문가라는 사람들이 김영주가 평양에 돌아온 것은 「10월 중순이다」 「서울 남대문시장에서 지개를 지고 공작하다가…」 「하와이에서 교회 일을 보다가…」 「모스크바 유학 중에…」 등으로 주장하고 있는데 그것은 틀린 얘기니 참고하시기 바란다.
그가 평양으로 떠날 때 필자에게 한 마지막 말은 『내가 일본군에서 통역했다는 사실을 안다면 형님은 나를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용서가 아니라 맞아 죽을 거예요』였다. 그렇게 떠나가던 그의 슬쓸한 뒷모습을 나는 그후 오래도록 잊을 수 없었다.
진짜 친일·반역자들이 해방 후 뻔뻔스럽게 연행하는 것을 볼때마다 그의 민족적 양심이 더욱 내 가슴에 와 닿는 것이었다.
아무튼 46년전 그와는 그렇게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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