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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58)|<제85화> 나의 친구 김영주 (43)|김영주의 첫 「사상」 고백|이용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1면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국민 의사와 이반된 대통령은 없애버려야 한다』는 김영주의 폭언은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만주 사변이래 15년간이나 살육과 약탈을 자행해 온 일본 침략군과 그들의 거류민을 『전원 무사히 귀국시키겠다. 그리고 일본에는 한푼도 배상금을 청구하지 않겠다』는 장개석에게 중국 국민들은 왜 불만이 없겠는가. 만약 우리 조선 사람 같으면 불만이 아니라 분노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분노는 곧 폭발하고야 말았을 것이다 (이승만 하야 때처럼).
김영주가 사단장에게 좀 과격하게 말한 것은 골수에 박힌 그의 원일혼 때문이다.
결코 「국민 의사와 이반된 장개석 총통을 없애버려야 한다」는 이런 뜻이 아니었는데 혹시 소사 단장은 오해나 하지 않았는지.
이일 저일로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던 김영주가 내게 말을 걸었다.
『이 동지도 잠을 못잡네다 그려.』
『네, 잠이 안 오는데요.』
『내일이면 부대를 떠나 고향에 가게 됐으니 잠이 올리 있겠습네까. 그런데 서울에 가면 이 동지는 공부를 계속하시겠지요.』
『글쎄요. 조선은 지금 당파도 많고 38선으로 남북이 갈라진다고 하니 걱정 아닙니까.』
『이 동지, 아까 소사 단장 말씀 들었지요. 일본이 항복하던 날 미국대통령 트루먼은 「이제야 진주만의 원수를 갚았다」고 좋아했다지 않습네까. 그리고 영국의 애틀리 총리는 「이제 일본은 동양에 있는 영국 식민지를 넘보지 못하게 됐다」며 좋아 날뛰었다지요. 그것이 다 자기 나라 이익만을 일삼는 말들이지요. 큰 나라들이 자기들 이익만을 생각하고 무력을 휘두르면 우리 같은 작은 나라는 어떻게 살아남습네까.
36년전 일본이 우리 조선을 먹어 삼킬 때 미국은 비율빈 (필리핀)을 점령하면서 서로 눈을 감자고 한 것 아닙네까. 신사라고 뽐내는 영국도 우리가 일본에 먹힐 때에는 한마디 말도 없었지요. 오히려 그들은 「일본아, 어서 더 강해져라. 그래서 소련의 동방진출을 막아다오」 한 겁네다. 도대체 그 친구들 믿을 수 없는 치들입내다. 이동지, 어떻습네까. 그치들을 믿을 수 있겠습네까.』
『….』
『이 동지 왜 말이 없지요.』
『….』
『그저 우리 약소민족이 살길은 단 하나 밖에 없습네다. 국토와 언어·풍속·습관 등 민족 고유의 것을 누리면서 살 수 있는 연방제의 일원이 되는 것입네다. 그 외에는 딴 도리가 없습네다. 이 동지, 어떻습네까. 내 말이 옳지요]
이말은 그가 나에게 한 첫번째 사상 고백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떠돌이 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학교라고는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다는 그가 언제 어데서 배웠길래 그런 말을 하는가. 그러나 전문학교까지 다녔다는 나는 도대체 무엇을 배운 것이냐.
그날 밤 나는 호소하듯이 파고드는 그의 말에 공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나의 생각은 귀국한 후까지도 오래도록 지속된 것이다. 우리 약소민족이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공산권 연방제에 흡수될 수밖에 없다는 김영주였다.
그런 김영주는 지금 소련 연방으로부터 분리·독립하겠다며 들고일어난 여러 동유럽 국가들 양상과 또 고르바초프의 개혁 추진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할 수 없이 가입한다는 북한의 유엔 가입에 그는 지금 어떤 심사일까. 나의 친구 김영주가 아직도 어린 시절 나에게 권고했던 그런 생각이라면 오늘날 이 새로운 사조 속에서 하고 있을 그의 고뇌는 어떠한 것일까.
날이 밝았다. 오늘은 우리가 부대에서 떠나는 날이다. 『이루핑안 (일로평안=잘 가세요)』『짜이젠 (재견=다시 만납시다)』 우리들은 중국 친구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마차 위에서 손을 흔들었다.
우리를 태운 만원 열차는 상해를 향해 기적을 울리면서 달리고 있었다. 얼마 만에 찾은 자유의 몸이냐. 그리고 정녕 나는 지금 내 고향 조선으로 가고 있단 말인가.
끝없이 펼쳐지는 평야에 노란 배추꽃, 그 사이를 흐르는 운하에 한가로이 떠 있는 조각배들, 그것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우리들은 멀리 태호를 바라보면서 소주를 지나고 있었다.
「상유천당 하유소항 (하늘에는 천당,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소주성외 한산사 야반종성도명선」 그 유명한 장계의 「풍교야박」 시상이 바로 이곳이건만 털털거리는 3등 열차에 한산사의 종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상해는 먼저 갔을 때보다 더 혼잡했다. 비행장에 산더미처럼 쌓아올린 드럼은 아직도 불타고 있었다. 중공 공작원이 불을 지른 것이다.
2월말 상해를 떠난 일본 난민 수송선 에지마 마루 (강도 환)가 수뢰에 걸려 침몰했기 때문에 3월 하순에 있을 귀국선편이 4월말로 연기되었다는 것이다.
우리 일행은 민단 이철 선생의 알선으로 교포들 집단 수용소에서 기거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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