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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52)제85화 나의 친구 김영주(37)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형과 아우>
강언덕에는 풀벌레 소리 처량했고 조각달은 저멀리 동북쪽 내고향 하늘에 떨고 있었다. 바람이 심하게 불었으나 우리는 배갈을 마신 탓으로 훈훈했다.
『이 동지는 아까 우리 형님과 내가 언제·어떻게 헤어졌느냐고 물었디요.』
이렇게 말을 꺼낸 김영주는 술잔을 비우고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작은 형(철주)이 전사한 후(1934년께) 너만이라도 살아남아야 한다며 성주 형님이 나를 유격대 근거지에서 억지로 내쫓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형님 곁을 떠나기 싫어 울고불고했지만 결국 형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때가 몇 살 때입니까.』
『작은 형이 죽은 1년 후였으니 1935년, 그러니까 열다섯이었어요.』
『그후 지금까지 형님을 못 만난겁니까.』
『아니지요. 혼자 떠돌아다니다가 형님이 하도 보고싶어서 야단 맞을 각오를 하고 2년 후에 다시 유격대로 찾아갔습니다. 바로 그때 나도 보천보 습격에 참가한 겁니다.』
『그러니까 형님과 마지막으로 헤어진 것은 언젠가요.』
『1940년 말 내가 하얼빈의 일본놈 철물상에서 일하고 있었을 때입니다. 전부터 잘 아는 형님 부하가 찾아와서 형님 편지를 보이길래 따라나섰지요. 형님의 부하라고 아무나 함부로 따라갔다가는 변을 당할 때였으나 나는 형님 편지를 보고 시베리아 국경쪽으로 기차로 이틀을 갔어요. 그리고 다시 설원을 지나 깊은 산 속에 있는 밀영(숨은 기지)에서 형님을 만났는데….』
이 대목부터 그는 목이 메어서 말을 못하고 눈물을 삼키고만 있었다.
그는 형과 일주일간 밀영에 같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계속 형과 같이 있고 싶다는데도 억지로 쫓겨나서 다시 늑대와 산짐승이 우글거리는 산길을 타고 하얼빈으로 돌아왔다는 얘기를 겨우 이어갔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형님이 나를 부른 것은 형님 유격대 뿐만 아니라 만주에 있는 반만항일군들이 일본군 토벌대에 견디지 못해 시베리아로 떠나기 전에 동생을 한번 보고자 했던 것이죠.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싶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그 유언이 무엇이었느냐고 물었으나 그는 그것만은 말할 수 없다고 했다.
1910년 경술국치를 전후로 국내에서 활동하던 우리 의병들 대부분은 만주나 시베리아로 무대를 옮겨갔다. 그때 소련은 레닌이 공약했던 약소민족 해방노선에 따라 처음에는 우리 임시정부를 도왔으나 국익을 앞세워 1925년1월 소일간 수교조약을 체결하고 조선인의 독립운동을 소련영토 내에서 금지시켰다.
또 같은 해 6월 만주 봉천성은 조선총독부와 소위 반공적 미쓰야(삼시) 협약을 맺어 공산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진영의 독립운동을 금지시켰다. 미쓰야협약이 체결된 후에는 일부 중국국민당 경찰이 일본경찰의 앞잡이가 되어 조선독립운동가를 체포, 일본경찰에 넘기는 웃지 못할 사태를 낳았던 것이다.
김영주가 형 김일성의 부름으로 소만국경으로 갔었다는 1940년 말은 만주에서의 항일세력, 특히 무력항쟁은 이미 종식을 고할 때였다. 그때는 우리 독립운동주류인 이청천 장군 이하 간부 30여명이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 설치를 위해 중국대륙으로 떠나버린지 오래였고 홍범도·김좌진, 그리고 조선혁명군 총사령 양세봉 장군의 혁혁한 무공도 이미 지나간 옛날 이야기가 돼버린 때였다.
한인 좌익세력이 참여하고 있던 유일한 동북항일련군도 일제의 관동군과 괴뢰 만주국군의 탄압으로 1940년에 들어서서는 종적을 감추게 되었던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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