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책읽기Review] 발품으로 파헤친 '아메리카 속살'

중앙일보

입력 2007.01.05 19:33

업데이트 2007.01.06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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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아메리칸 버티고 (원제 American Vertigo)
베르나르 앙리 레비 지음, 김병욱 옮김
황금부엉이, 480쪽, 1만6500원

여행기나 탐사기를 평할 때 흔히'속살을 파헤쳤다'는 표현을 쓴다. 그러나 다소 염기(艶氣)를 띠었지만 찬사에 가까운 이런 문학적 수사에 제대로 값하기는 쉽지 않다. 충분한 시간과 준비, 그리고 뜻있는 여정의 확보만으론 충분치 않아서다. 적절한 것 혹은 상징적인 곳을 보고 듣는 것에 더해 속 깊은 흐름을 짚어낼 식견과 통찰력, 여기에 이를 담아낼 글솜씨가 없다면 건조한 여행기나 겉핥기식 인상비평이 되기 십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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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면에서 미국답사기인 이 책은 최상의 여건 아래 쓰여진 셈이다. 우선 지은이가 1970년대 전체주의에 대한 증오와 자유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이른바 '신철학'을 주창했던 세계적 철학자다. 게다가 파키스탄 등 세계 분쟁지역을 취재한 저널리스트이자 프랑스의 대표적 문학상 중 하나인 메디치 상을 받은 소설 '머리 속의 악마'를 쓴 작가며 영화감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력을 지닌 그가 2005년 미국을 1년 가까이 헤집고 다녔다. 미국 시사지 월간 애틀랜틱이 프랑스의 자유주의 사상가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탄생 200주년 기념 프로젝트였다. 그 덕에 레비는 교도소.사창가에서 민주당 전당대회장까지 관광객은 물론 보통 미국인이 쉽게 가 볼 수 없는 곳과 만나기 힘든 사람을 접했다.

일찍이 19세기에 교도행정을 살피기 위해 미국을 찾았던 토크빌은 미국의 앞날을 예시한 '미국의 민주주의'를 써 이름을 얻었다. 레비는 토크빌의 여로를 되짚어가며 세계 유일 초강대국에 탐침(探針)을 꽂는다.

뉴욕 시 안에서 별개의 도시를 이루고 있는 악명 높은 감옥, 라이커스 아일랜드가 나온다. 마천루들이 손에 잡힐 듯 눈에 들어오지만 지도에도 나오지 않고 뉴욕 시민들도 그 존재를 모르는 곳이다. 과거 그곳이 쓰레기처리장이었다는 설명에 레비는 독자들에게 묻는다. 같은 장소에서, 쓰레기들이 사회의 떨거지들로 대체됐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20년 전 지역편중 해소라는 명분으로 US스틸과 포드 사가 공장을 옮겨간 뒤 녹슨 표지판이나 해체되는 마천루 등만 남은 버펄로, 30년 전 인종폭동과 백인들의 교외 이주 후 삐걱거리는 주택과 철조망이 쳐진 술가게 등만이 황폐화를 증언하는 디트로이트 이야기도 있다. 죽어가는 대도시, 현대적 폐허를 보면서 지은이는 수수께끼를 본다. 유럽 도시의 토대가 되는 '도시 사랑'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게 아닌가 하는.

인상만 기록해서야 값진 여행기가 될 수 없다. 그래서일까, 레비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빠뜨리지 않는다. 야구 발상지라는 쿠퍼스 타운의 관광객들에게서 가짜-야구는 벌써 고대 이집트에서 모습을 보였단다-임을 알면서도 가짜 신화를 믿는 보통사람들,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면서도 '훌륭한 미국인'이 되고자 유대인들을 따라잡으려 안달하는 아랍계 시민들, 하나님을 신이라기보다 마치 친절한 신사나 친구처럼 여기는 초대형 교회 신자 등 다양한 '미국인들'의 목소리를 한 자리에 모았다.

장삼이사만 나오는 게 아니다. 민주당 대선후보로 유력시되는 배럭 오바마, 정치인처럼 말하는 샤론 스톤, 클럽에서 연주하는 우디 앨런, 스페인계를 경멸하는 새뮤얼 헌팅턴 등 저명 인사들과 생생하고 날카로운 인터뷰도 실렸다.

이 자칭 반(反)반미주의자는 곳곳에서 나부끼는 국기나 틈만 나면 미국인임을 역설하는 데서 국가적 컴플렉스를 보고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행태가 '모욕당한 어린이' 같다고 거침없이 지적한다. 결론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장(章)마다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이 때문에 책을 읽는 것이 놀이공원의 롤러 코스터를 타는 기분이다. 그만큼 속도감 있고 현란하다.

이 중 워싱턴 등 4명의 대통령 얼굴이 거대하게 암각된 러시모어 산에 관한 대목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그곳을 만든 건축가 거츤 보글럼은 악명 높은 KKK단 회원으로 원래는 남북전쟁 당시 남부군 영웅 3명의 기념비를 만들려 했단다. 게다가 러시모어 산은 인디언 라코타 족이 신성한 장소로 여기던 블랙힐스의 심장부였으며 산 이름조차 인디언 착취를 돕던 변호사 이름을 딴 것이란다.

이 책은 이처럼 우리가 잘 모르는 미국의 내면을 보여준다. 읽고나면 정말 어지러울 정도로.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다소 이론적이긴 하지만 책 말미의 에필로그에서 지은이가 미국의 오늘과 내일을 정리해 놓았으니 말이다.

김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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