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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Story] '통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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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물리학 오세정(서울대 자연대학장), 행정학 염재호(고려대), 경영학 김진우(연세대) 교수, 화학 문대원(한국표준과학연구원) 박사 등 아무런 연관이 없을 것 같은 이질적 분야의 학자들이 매달 한 차례씩 모여 토론한다. 애니메이션을 전공한 고욱(아주대) 교수와 기계공학을 가르치는 박영필(연세대) 교수 등도 참여한다.

삼성이 3년여 전부터 주관하고 있는 미래기술연구회의 멤버들이다. 국가 석학으로 선정된 물리학 임지순(서울대) 교수와 의학 안규리(서울대), 사회학 김용학(연세대) 교수 등도 한때 참여했었다. 삼성 측에서는 이윤우 전자 부회장과 임형규 종합기술원장 등이 참석한다.

멤버들이 각자 전공 분야를 알기 쉽게 설명하거나 최신 흐름을 발표하는 방식으로 모임은 진행된다. 외부 인사들을 초빙해 토론을 벌일 때도 있다. 삼성 관계자는 "다양한 분야의 석학들과 함께 고민하다 보면 반도체 이후 '한국을 먹여 살릴 먹거리'에 대한 해답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산업현장에 '통섭(統攝)'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통섭이란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통합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범 학문적 연구를 일컫는다.

기업들은 수년째 미래의 신수종 산업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외부에서 '천재'도 영입해 왔지만 아직 눈에 확 띄는 것은 없다. 여전히 반도체.자동차.조선.철강 등 5대 품목이 10여 년째 한국을 먹여살리고 있다. 이런 답답한 현실에 대한 해법을 기업과 학계는 통섭에서 찾고 있다.

오세정 학장은 "생명공학(BT).정보기술(IT) 등이 한국 산업을 끌어갈 것이라고 한 지 오래됐지만 5년 뒤, 10년 뒤 우리의 먹거리를 찾아줄 분야를 아직 못 찾고 있다"며 "통섭이 해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생물학자인 최재천(이화여대) 교수는 올 9월 생물학 등 각 분야의 전공을 망라해 종합적인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 '통섭원'이라는 센터를 설립했다. LG전자는 최근 이 통섭원과 공동 모임을 하기로 했다.

LG 관계자는 "제조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해 있으므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아이디어나 개념"이라고 말했다.

긴팔원숭이나 말벌 등 동물들의 의사소통 메커니즘을 연구하고 있는 최 교수와 같이 논의하다 보면 새로운 제품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흙탕물에 살면서도 멀리 있는 먹잇감을 잡아먹는 가물치의 특성을 연구하면 새로운 개념의 비행기 조종사용 고글 안경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다.

삼성경제연구소 윤순봉 부사장은 "20세기는 분할된 전문지식의 시대였지만 21세기는 통합된 거대 지식의 시대"라며 "가령 외국인과 통화하면서 자동으로 통역이 되는 자동 번역 휴대전화를 만든다면 세계시장을 제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휴대전화를 만들려면 정보기술(IT)뿐 아니라 언어학.심리학.인지과학 등 인문학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최재천 교수도 "통섭원과 함께 논의하자고 제의하거나 후원해 주는 기업이 많다"고 밝혔다.

SK텔레콤.태평양화학.유한킴벌리 등이 그런 회사들이다. 최 교수는 "최고경영자들을 만나 경영과 아무 관련이 없는 개미와 침팬지 얘기를 하는데도 열심히 메모하며 귀를 기울이더라"며 "신산업을 찾는 일이 그만큼 기업들에 절박하다는 얘기일 것"이라고 해석했다.

심리학자인 이춘길(서울대) 교수는 본업에 걸맞지 않게 인공 눈을 만들고 있다. 이 교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얼굴을 알아보는가를 연구하다가 시각 메커니즘에까지 연구를 넓히게 됐다"며 "의학.생물학.컴퓨터 공학자들과 함께 연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업컨설팅 회사인 한스컨설팅 한근태 사장은 "기업들이 통섭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지 오래되지 않았지만 본격적으로 달라붙으면 큰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김영욱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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