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년 가을 훌쩍 일본으로 떠난 작가 한수산씨(45)가 현대문학상 수상을 위해 일시 귀국했다.72년 동아일보신춘문예에『4월의 꿈』이 당선돼 문단에 나온 한씨는 장편『부초』『해빙기의 아침』등을 발표하며 질은 감성과 화려한 문체로 70년대 독서 계를 이끌었던 작가.
그러나 81년 본지에 연재하던 장편 『욕망의 거리」의 몇몇 표현이 당시 권 부의 비위를 거슬려 한씨는 시인 박정만씨 및 신문사 관계자들과 함께 기관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망했다. 이른바「한수산 필화사건」으로 불리는 그 한을 삭이지 못하고 88년 가을 박씨는 저승으로, 한씨는 일본으로 떠나버렸다.
-수많은 독자, 그리고 당신의 문학을 저버리고 왜 일본으로 뗘나야 만 했습니까.
『인간에 대한 사망과 신뢰 없이는 글을 쓸 수가 없습니다. 작가는 궁극적으로 인간과 인간들이 꾸미는 사회를 따뜻한 애정으로 바라봄으로써, 동물과는 다른 인간성의 훈훈함을 전함으로써 밥 벌어먹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고문은 나에게로부터 그러한 인간성에대한 신뢰를 송두리째 앗아가 버렸습니다. 자신들이 임의로 꾸민 조서에 답하라며 끊임없이 가해지는 폭력, 그리고 진실을 왜곡하며 조서대로 답할 수밖에 없게 했던 그 엄청난 육체적 고통…. 그러한 비인간적 상황을 겪고 부 터 글쓰기가 힘들더군요.』
-박정만씨는 당신과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끌려가 당한 고문으로 끝내 숨지고 말았지 않았습니까.
『고문을 당한 후 정만이 에게 서 날씨만 흐리면 전화가 오곤 했어요. 온몸이 쑤셔 못살겠다 고요. 그럴 때면 맞아서 쑤시는 것이 아니라 네가 늙어서 쑤시는 것이라 생각하라고 말하곤 했지요. 맞아서 쑤신다고, 그 때의 그 분노를 삭이지 못하면 너는 화병으로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다고요. 그러나 그 친구는 그 분노를 이겨내지 못하고 생활은 엉망으로 접어 둔 채 술로만 살다 결국 저승으로 간 거지요.』
-그 사건 후 그래도 당신은7년간 국내에서 버티며 작품활동을 계속하지 않았습니까.
『철저히 개인적인 공간에서 인간에 대한 애정으로 글쓰기를 하는 작가에게도 엄청난 고문을 가하는 그러한 비인간적인 사람들이 정치지도자로 나서는 것을 보고 경악했어요. 싸우기는 싸워야겠는데 운동권 작가와 같은 문학은 내 체질에 맞지 않고, 그렇다고 인간성에 대한신뢰를 상실하고 사랑 운운하는 글을 쓰는 내 자신에 대한 혐오감도 몰고, 그래서 철저히 외면된 상태에서 내 작가적 역량 내지 양식을 충전해 보고자 일본으로 떠난 거지요.』
-일본에서의 생활은 어떻습니까.
『책 읽고 글쓸 준비도 하고 글에 필요한 자료가 있으면 그걸 취재하러 일본 각지를 돌아다니곤 합니다. 특히 일본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오늘의 일본이 솟아난 근거, 즉 전통 문화·예술에 관심을 갖고 그 유적지를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일본 체류 체험을 살려 올 여름 일본의 문화·풍속 등을 다룬「일본문화론」을 출간할 계획이며, 재일 교포의 삶을 다룬 장편과 일본인들의 삶을 다룬 중·단편들도 쓸 계획입니다.』
-계속 일본에 머무를 계획입니까.
『일본에서 구상한 작품 취재를 위해 을 연말까지는 그곳에서 지내야겠습니다. 올 연말이나 내년 초 귀국, 거기에서 구상한 작품들을 쓸 예정입니다. 지금까지 내 작품이 개인적인 내면,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에만 머물렀습니다만 앞으로 쏠 작품에는 역사성과 사회성도 충분히 덧붙일 예정입니다.』 <이경철 기자>이경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