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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건강] 그림이 의사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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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 잘린 고흐의 '자화상'을 떠올려 보자. 꿈틀거리는 선(線)이 그의 격정과 분노를 보여준다. 노르웨이 화가 뭉크의 대표작 '절규'.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눈과 입을 크게 열고 절규하는 듯한 이 작품에선 말년에 정신질환까지 걸렸던 화가 자신의 고독.불안.절망의 감정이 실감나게 전해진다. 이처럼 인간은 자신의 경험이나 무의식 속에 감춰진 세계를 미술로 재현하려는 욕구가 있다. 이를 이용한 심리치료가 바로 미술치료다.

처음엔 진단의 도구로 주로 썼다. 정신질환 환자들이 그린 그림을 풀이해 억압된 내면의 갈등을 찾아내고자 한 것. 요즘은 진단보다 치료 목적으로 널리 활용된다. 미술과는 담을 쌓고 지내던 사람이나 정신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는 성인에게도 적용된다.

◇ 어린이 발달 장애를 치료한다=경기도에 사는 6세 여아는 미술치료에 들어가기 전인 올 봄만 해도 말을 거의 하지 못했고 몸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낯선 사람과 눈을 맞추지 못했고 엄마 품에 안기지 않았다. 미술 치료를 시작한 첫 3개월 동안엔 치료사를 피하거나 할퀴는 등 공격 성향을 보였다. 그러나 그림 도구를 만지고 실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마음속의 억압이 풀려 나갔다. 치료 시작 5개월 후부터는 치료자를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엄마 품에 덥석 잘 안긴다. 눈을 맞추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굳어졌던 근육도 많이 풀렸다.

이처럼 미술치료는 언어 표현력이 부족하거나 가족.사회 모두에게 말문을 닫았던 아이들에게 효과적이다. 따라서 지체.발달 장애, 자폐증, 학습.정서장애, 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장애, 분리 불안 장애 아이 등의 치료에 적합하다. 신체적 학대를 받는 아이를 가려내는 데도 유효하다. 이런 아이들은 말로 자신의 고통을 털어놓기보다는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이 훨씬 쉽기 때문이다. 어릴 때 부모에게 학대받은 아이는 부모를 악마처럼 그려 놓는다. 부모와 충분한 대화를 하지 못했던 아이는 자신과 부모가 등을 돌리고 있는 모습을 그린다.

아이들에겐 여러 미술치료 기법 가운데 자유 그림(난화)이 효과적이다. 빈 용지에 아무 생각없이 긁적이는 자유 그림엔 각자의 개성과 문제가 잘 드러난다. 필압(筆壓)만 봐도 아이의 심리 상태나 성격 등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 이 기법은 눈 감거나 뜨고 낙서하기, 두손으로 낙서하기, 사용하지 않는 손으로 낙서하기, 단어를 제시한 뒤 연상되는 그림 그리기 등 다양한 시도가 가능하다.

◇ 부부관계의 해결사=남들에게 말로 털어 놓기가 힘든 부부 문제도 미술치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성인들은 그리는 행위 자체에 부담을 느끼기 때문에 직접 그리기보다는 잡지 사진을 오려 붙이는 콜라주를 많이 활용한다. '풀칠하다''바르다'는 의미인 콜라주는 잡지.종이.사진.화보.헝겊.톱밥 등을 이용해 자신의 내면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다.

부부들은 미술로 표출된 '고해성사'를 통해 막연했던 내면의 갈등을 구체적으로 인식하며 사태를 직시하게 되고 실마리를 찾게 된다. 치료는 보통 남편과 아내의 문제.특징 평가, 과거 성장과정에 대한 기억, 부부 문제의 원인 추적, 부부생활에 대한 긍정적 기억 떠올리기, 부부관계 회복 등의 수순을 밟는다.

남편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30대 여성 P씨의 치료과정을 보자.

우울증이 있던 그는 미술치료에 들어갈 무렵, 사랑을 뜻하는 하트 위에 가시를 그려 놓았다. 그에게 성은 고통스럽고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아픈 가시'였던 것.

미술 도구로 점토를 쥐어주자 그는 자신의 가슴속 응어리를 표출하듯 덩어리를 만들었다.

그후 부부가 함께 말없이 그림을 그리면서 마음과 마음을 잇는 그림이 완성됐다. 이 그림엔 해바라기.해.꽃에 앉은 잠자리 등이 그려져 앞으로 이들 부부의 관계가 나아질 것이란 기대를 갖게 했다. 이어 손뜨기(자신의 손을 백지에 본뜨는 것)를 한 뒤 각자 상대방에게 바라는 것을 적었다. 또 부부가 함께 침실을 꾸미고, 이사할 때 버리고 싶은 물건을 그림과 글로 각자 나타냈다. 끝으로 모든 가족이 협력해 벽화를 완성했다.

이 결과 남편에게 자신의 감정을 적절히 표현할 수 있게 되고 원활한 의사소통이 가능해졌으며 좋아하는 색도 분홍색에서 자기 주장이 강한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 치매 진행을 늦춘다=잠시도 가만 있지 못하고 쉴새없이 같은 말을 반복하는 70대 중반의 치매 환자 N씨는 미술치료를 받은 후 주변을 깜짝 놀라게 했다. 색칠을 하면서 10분 이상 집중력을 보인 데다 색깔을 골라 쓰는 능력도 뛰어났기 때문이다.

미술치료가 치매를 낫게 하는 것은 아니나 진행을 늦추고 심리적인 도움을 준다. 치매 환자들은 자신의 무능력에 대해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데 미술 작업에 참여하면서 자신감을 되찾는다. 손과 눈의 협응 작용, 소근육 운동 등의 효과도 있다. 그림에 관해 얘기하다 보면 언어능력과 사회성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도 가외의 소득이다.

나이 들어서도 머리를 많이 쓰는 것이 널리 알려진 치매 예방법. 노인들에게 어린 시절 고향 풍경을 그리게 하거나 '내가 아끼는 물건''내가 사랑에 빠진다면' 등의 주제를 제시하고 그림을 그리게 하면 시간가는 것을 잊고 작업에 열중한다. 치매 예방 외에 노인의 우울증에도 미술이 효과가 있는 치료수면이있다.

박태균 식품의약전문기자

<사진설명>
20대 초반의 여대생이 자신을 콜라주 기법으로 표현한 것. 그림 속의 사과는 자신이 '사과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는 의미. 카메라는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자신의 취미를 나타낸다. 간혹 학을 접어 '내 아내에게 학을 뗐다'고 표현하는 남편도 있다. 미술치료는 이 같은 자기소개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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