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는 지난달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ASEAN) 순방 때 아세안과 ‘포괄적 전략동반자 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필리핀과는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수립했다. 한국은 지난 20년간 30여 개 나라와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맺었는데, 지난 1년 동안 이 관계를 맺은 나라만 8개다.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대한 합의된 정의는 없다. 외교 관례상 동맹 다음으로 최고 단계의 협력 관계에 대한 성격 규정 또는 비전 설정이다. 특히 EU는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맺을 때 까다로운 기준을 적용하기 때문에 한국,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캐나다, 인도 등 10개국과 이 관계를 수립했다.
30여 국과 전략적 동반자관계
신냉전 시대 기존 관계 모순도
북·러 신조약 사드 사태 능가
위기의 시대, 전략적 대응 필요
한·미 동맹도 2009년 미래 비전 정상 공동성명에서 ‘포괄적인 전략동맹’에 합의하고 지난해 정상회담 이후 ‘글로벌 전략동맹’으로 의미를 넓혔다. 전략 동맹이건, 전략적 동반자건 양자 차원을 넘어 지구적 및 지역적 차원에서 높은 수준의 협력 관계를 지향하거나 전 단계인 동반자 관계보다 협력의 범위와 수준을 심화하려는 의지의 반영이다.
남북한 모두 전략적 동반자 맺은 러시아
그런데 냉전 종식 이후 순조롭게 전개되던 한국의 전략적 동반자 체계가 복합 위기의 신(新)냉전 시대를 맞으면서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첫 번째는 2016년 주한 미군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 결정에 따른 중국의 보복과 ‘전랑외교(战狼外交)’로 나타났다. 지금까지도 중국의 이런 공세외교 여파가 계속되고 있다.
두 번째는 미·중 전략 경쟁의 심화로 동맹과 전략적 동반자 간 비전과 정책의 불일치 영역이 늘어나고 있다. 세 번째 지난 6월 북·러가 체결한 ‘포괄적 전략 동반자 조약’(북·러 조약)은 사드 사태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지정학적 변화를 초래하고 있다. 양국 간 상호 지원과 북한의 러시아 파병에서 보듯 일시적인 ‘편의 결혼’과는 차원이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동 조약에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항구적으로 유지 발전시킨다”, “제도적 조치를 취한다”고 한 것은 동맹 관계의 붙박이화 의지를 반영한다.
러시아는 한국의 전략적 협력 동반자이자 북한의 포괄적 전략 동반자다. 북한이 한국을 적대국으로 공식 규정하고 교전국 상태에 부합하는 각종 도발을 하고,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유엔 총회가 러시아를 침략자로 규정한 상황에서 남북한 모두 러시아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연결되어 있는 건 모순이다.
기존 전략 동반자 간 마찰 증대
북한이 한국을 핵무기로 완전히 평정하겠다는데 러시아는 이러한 북한을 옹호하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북한 제재 전문가 패널을 해체하며 대북 압박 창구를 없앴다. 나아가 북한군을 우크라이나전에 참전시키면서 우리가 우크라이나에 살상 무기를 제공할 경우 강력한 보복까지 위협하고 있다. 한·러 간 신뢰와 협력을 전제로 한 전략적 동반자 관계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과 북한의 파병으로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된 것이다. 북한 파병에 대한 러시아의 반대급부와 북·러 조약 제4조(지체 없이 모든 수단으로 군사 및 기타 원조 제공)에 따른 의무 이행은 더욱 우려된다. 최악의 경우 북한의 대남 무력 도발 시 러시아의 지원과 관여 등 다양한 시나리오를 예상할 수 있다.
한국이 한·미동맹과 중·러와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동시에 발전시킨다는 비전이 현실과 괴리가 있을 것이라는 우려는 일찍이 미국 일각에서 제기한 바 있다. 2008년 5월 ‘한·중 전략적 동반자 관계’, 같은 해 9월 ‘한·러 전략적 동반자 관계’가 수립되었을 때다. 이런 우려가 이제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한·일 관계, 전략적 협력 강화해야
반면 이러한 지정학적 변화 속에서도 정작 한국은 일본과 합의된 국가 관계 규정 자체가 없다. 양국 정권의 성격에 따라 편의적으로 규정할 뿐이다. 지난해 캠프 데이비드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 회의와 후속 조치를 통해 실질적으로 전략적 협력을 강화키로 한 건 의미가 있다. 지난 7월 한·미·일 국방 장관이 3국 안보 협력의 기본 방향과 정책 지침을 제공하는 최초의 문서인 ‘안보협력 프레임워크 협력각서’를 채택한 것은 한·미·일 협력의 제도화를 위한 이정표적인 조치다.
앞서 한·일 국방 장관이 상호 신뢰와 안보 협력을 제고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기로 한 것도 의미가 크다. 이는 내년 한·일 수교 60주년에 맞춰 양자 관계를 격상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지난 수 개월간 한국, 미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의 외교 및 국방 장관들이 양자, 3자, 4자 회의와 외교·국방 2+2장관 회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의를 통해 현상 변경 시도를 거부하는 강력한 메시지를 발신한 것도 실제 협력을 제도화하려는 것이다.
2차대전 이후 가장 위험한 복합위기
향후 세계는 다양한 위기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안보·경제 리스크에 대한 정부의 주도면밀하고 전략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임기 후반기 윤석열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의 향방에 결정적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다음 주 미국 대선 이후 단기·중기·장기 대책을 총 점검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트럼프 후보가 당선될 경우 우크라이나, 북한 정책에 미칠 함의까지 염두에 둬야 한다. 또 최근 일본 총선 이후 일본 내 동향이 한·미·일 협력과 한·일 관계에 끼칠 추가적 영향도 변수로 고려해야 한다. 우리의 선택지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인·태 지역과 유럽 및 NATO 등 입장이 유사한 국가들과 공동 전선을 펼쳐 나가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이는 향후 한반도 등 인·태 지역의 위기가 발생했을 때 대책과도 직결된다. 마지막으로 러시아와 북한에 대한 기존 제재나 우크라이나 지원 및 정보 협력과 별개로 상황 진전에 따른 정교하고 다양한 압박 카드를 마련했으면 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전 협상 전망과 관련된 대책도 검토해 나가야 한다. 30여년 전 북방 외교가 전개되던 상황과 정반대로 지금은 2차대전 종전 이후 가장 위험한 복합 위기의 시대라는 진단은 과장이 아니다.
지금까지 맺은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동맹 및 우방국과 연대해 위협을 억제하는 통합 억제에 적극 활용해야 할 중요한 이유다.
윤병세 REAIM 글로벌위원회 의장·전 외교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