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전영백의 아트다이어리

미술, 환영과 리얼리티 사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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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전영백 홍익대 교수 미술사·시각철학

전영백 홍익대 교수 미술사·시각철학

첫사랑의 기억은 누구에게나 달콤하다. 환상과 함께 추억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 우연히 첫사랑과 마주치게 되면 ‘차라리 만나지 말걸’ 싶어진다. 감미로웠던 환상은 현실의 찬바람 속에서 깨어나기 때문이다.

미술사에서의 환상은 시각적 환영(optical illusion)이라 말할 수 있는데, 이는 모더니즘에서 추구되었다. 미적 프리즘으로 승화된 눈의 환영은 인상주의를 시작으로 포비즘과 큐비즘 등을 거쳐 추상표현주의, 색면회화로 진행된다. 앙리 마티스의 단순하고 세련된 색채 디자인은 삶의 환희와 조화를 느끼게 하고, 마크 로드코의 회화는 보는 순간 명상으로 이끌며 정신의 고양을 가져온다. 눈에서 비롯된 이러한 미적 환영은 다양한 표현을 불러오며 현대미술의 꽃을 피웠다. 그러나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들어가듯, 모더니즘의 꽃은 20세기 중반부터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시각적 환영 추구한 모더니즘
포비즘·큐비즘·색면회화 각광
60년대 이후 리얼리티가 주목
보느냐 느끼느냐, 미술의 이슈

존 리치(John Leech), 목판화, 런던 매거진 ‘펀치(Punch)’의 삽화.

존 리치(John Leech), 목판화, 런던 매거진 ‘펀치(Punch)’의 삽화.

‘시각적 환영으로부터의 탈피’가 시작된 것이다. 이 시기부터 발현된 포스모더니즘 미학은 미술의 눈에 씌워있던 환상의 콩깍지를 벗겨내고, 다른 방향으로 미술을 유도하게 된다. 마치 평생 함께 살 사람은 외모뿐 아니라 그 목소리와 몸의 촉각적 느낌, 생각이나 성격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처럼, 미술에서의 가치 기준이 바뀌기 시작했던 것. 1960년대에 이르러서 대세였던 회화를 누르고 바디아트, 설치미술, 대지미술 등이 등장했고, 다큐멘터리 및 개념미술이 부상하게 된다. 연이어 1970년대에 들어 사진이 미술의 영역으로 본격 편입된 것도 이런 가치를 반영한 변화였다. 작가의 시각적 환영이 개입되지 않았기에 ‘예술’이 아니었던 사진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와 같은 이유로 포스트모던 아트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매김한다.

그렇게 환상을 벗겨내고 처음 마주한 리얼리티의 민낯은 자연스럽고 신선했다. 석양빛 물든 아름다운 거리, 각도 좋은 멋진 풍경화나 잘 꾸민 미인의 초상화보다, 햇볕에 드러난 일상의 거리, 흐트러진 침대나 화장기 없는 보통 사람의 얼굴 사진이 더 멋스러워 보인 것이다. 삶의 실제적 체험, 일상의 속살을 드러내기엔 사진 매체가 회화보다 훨씬 유리했던 것.

그래서 포스트모던 사진은 적나라하다. 이전에는 금기시했던 성적 관계나 폭력의 현장, 그리고 장애나 노화, 또 죽음의 흔적까지 작업에서 다룬다. 예컨대 낸 골딘(Nan Goldin; 1953~)은 남자친구한테 얻어맞은 멍든 얼굴로 카메라를 직시하는 자기 초상을 찍었고, 존 코플란스(John Coplans; 1920~2003)의 경우, 늙어가는 자신의 몸 중 지극히 사적인 부분을 대형 사진으로 남겼다. 이런 류의 작업은 기존의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실제 삶의 모습들이다. 미술작품에서 기대하는 미적 환상 대신, 갈등, 분노, 공포, 절망 등이 가득한 현실을 대면하게 하는 작업들이다.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는 인간의 본성은 상승에의 욕망과 하강에의 욕구로 이뤄져 있다고 했다. 여기서 상승이란 인간과 신을 연결하는 수직성이자 눈과 정신의 승화이고, 하강은 인간의 육체적 본능이자 중력의 지배를 받는 물질적 수평성 및 그 리얼리티를 나타낸다. 미술의 역사를 보면, 짧지만 함축적인 보들레르의 말에 십분 수긍하게 된다.

정신으로 잇닿는 승화는 눈의 환영을 이끌고 우리의 삶을 아름다움으로 고양한다. 이것이 바로 모더니즘이 추구한 미학이었다. 여기서 시각적 아름다움이란 거리를 두고 눈으로만 보기에 가능한 것.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그림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1870년에서 1905년 사이, 색채와 빛의 조합을 망막에 맺히는 대로 표현했던 그는 안개 낀 템스 강을지속적으로 그렸다. 그의 템스 강 연작은 실로 다채로운 색의 향연이었다.

그런데 실상 모네가 매료된 안개의 실체는 대기오염이었고 테임즈 또한 산업시설의 폐유로 인해 동물의 사체들이 떠다니는 죽음의 강이었다. 런던 포그(fog)가 만들어낸 희미한 풍경은 프랑스인인 모네가 건너편 호텔서 ‘눈으로만’ 봤기에 아름다웠던 것이다. “안개가 없는 런던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고 말한 모네는 템스 강을 멀리서 조망했지만, 그곳에서 사는 영국인들에게 런던 포그는 일종의 추한 리얼리티였다.

‘템스 강을 멀리서 조망할 것인가, 아니면 강물을 만지고 물에 들어가 볼 것인가?’의 문제는 미술의 근본 이슈인 셈이다. 즉 시각적 환영을 중시하는 모더니즘과 리얼리티에 무게추를 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미학이다. 우리의 삶도 환영과 리얼리티 사이 그 어디쯤 있는 것이 아닐까.

전영백 홍익대 교수 미술사·시각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