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동치는 미국 대선에 인종 문제가 막판 변수로 부상했다. 지난 27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유세에 찬조 연설자 코미디언 토니 힌치클리프가 한 “푸에르토리코는 쓰레기 섬”이라는 발언 때문이다.
그의 말은 인종차별성 발언으로 해석되며 히스패닉은 물론 흑인 등 다른 소수인종 유권자층의 반발을 사고 있다. 양 캠프는 긴박하게 움직였다. 해리스는 푸에르토리코 음식점에 찾아가 트럼프를 비난했고, 트럼프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일각에선 상승세를 타며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을 막판 역전했다는 평을 받는 트럼프에게 예상치 못한 '옥토버 서프라이즈'가 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31일로 투표일을 닷새 남긴 미 대선에서 인종 문제가 마지막 '폭탄급' 변수로 꼽히는 이유는 트럼프에게 '추격의 발판'이 된 계기 중 하나가 과거 민주당에 몰표를 줬던 흑인과 히스패닉 유권자 일부가 트럼프로 이탈한 것과 관련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해리스가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층인 이들의 막판 재결집에 성공한다면 승리 확률을 높일 수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최근 “2016년 멕시코 이민자를 ‘강간범’이라고 부르고 버락 오바마는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며 히스패닉과 흑인을 배척했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이번엔 이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백악관에 복귀할 가능성이 커졌다”고 보도했다. 트럼프의 막판 상승 배경이 달라진 소수인종 유권자의 표심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이번 대선 판세가 초박빙 구도 속에 혼전을 거듭하는 원인 중 하나로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층인 소수인종, 노조 등의 변화가 꼽힌다. 지난 13일 공개된 NYT의 여론조사에서 해리스 부통령은 흑인 유권자층에서 78% 대 15%, 히스패닉 유권자 사이에선 56% 대 37%로 트럼프를 앞섰다. 언뜻 해리스의 압도적 승리로 보이나 과거 두 번의 대선과 비교하면 상당한 차이가 발견된다.
퓨리서치센터에 따르면 2016년과 2020년 대선에서 트럼프는 흑인 유권자 사이에서 각각 85%포인트, 81%포인트 차로 패했지만 이번엔 격차를 63%포인트로 줄였다. 히스패닉의 경우도 8년 전 39%포인트에 달했던 격차가 절반 수준인 19%포인트가 됐다. 여기에 매번 민주당 후보를 공개 지지해왔던 대형 노동조합 중 일부도 이번엔 특정 후보를 지지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불과 수천표로도 승부가 갈릴 수 있는 이번 대선에서 트럼프로 돌아선 표심은 전체 선거 결과를 뒤바꿀 변수가 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상대의 기존 지지층을 흡수하는 건 표심을 정하지 못한 부동층을 설득하는 것보다 2배 이상의 효과를 지닌다. 사실상 양자 구도의 '제로섬' 게임에서 상대의 지지자를 뺏는 동시에 자신의 지지자를 추가하는 구조이라서다.
이러한 구조 때문에 9월 이후 각종 포퓰리즘상 공약과 미국우선주의를 내세운 경제 정책을 통해 흑인·히스패닉·노조를 적극적으로 공략한 트럼프의 지지율이 상승했다. 실제 중앙일보가 확인한 이들의 변심의 이유도 경제 때문이었다. 지난 4년 바이든 정부 때 확대된 인플레이션과 고용 불안에 대한 책임이 있는 바이든 정부의 부통령 해리스를 믿지 못하겠다는 주장이었다.
중앙일보가 만난 흑인 히스패닉 단체 대표, 노조 관계자들은 ‘이탈표’의 바탕에 지난 4년 바이든 정부 때 확대된 인플레이션과 고용 불안이 있다고 했다. 미국 최대의 흑인 유권자 정치 참여 조직 ‘콜렉티브 팩(Collective PAC)’의 쿠엔틴 제임스 대표는 본지 인터뷰에서 “지난 4년간 인플레이션에 시달려 온 젊은 흑인 남성들부터 부담이 노출됐다”며 “가정을 이끌어야 하는 젊은 남성 중 일부가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반복되는 트럼프의 화려한 수사에 동조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해리스를 지지하는 미국 내 히스패닉ㆍ라틴계 단체 ‘라틴아메리카시민연맹(LULAC)’의 도밍고 가르시아 전 의장도 “트럼프가 세금과 식비를 깎아주겠다는 말로 표를 잠식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해리스의 승리를 예견하면서도 “해리스가 만약 히스패닉의 표를 공짜로 얻는다며 당연시했다가는 후회할 것”이라고 말했다.
러스트벨트(쇠락한 공업지대)의 승패에 변수로 꼽히는 노조·노동자도 마찬가지다. 120만명이 가입된 북미 최대 산별 노조 ‘유나이티드 스틸워커스(USW)’의 제스 캄 대변인은 “해리스의 경제 정책이 노조의 입장에 보다 더 부합한다”면서도 “해리스가 자신의 정책 구상을 제대로 알리지 않으면서 고용 불안에 떠는 일부 조합원들이 이탈하고 있다”고 말했다. USW는 지난 7월 해리스 지지 의사를 공식 선언했으나 일부 조합원들이 최근 트럼프의 유세 단상에 올라가 지지 의사를 밝혔다. 캄 대변인은 “노조는 특정 정당을 무조건 지지하지 않는다”며 앞으로도 특정 정당에 대한 ‘몰표’ 가능성이 낮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트럼프는 이들의 불안감을 자극하는 데 '올인'했고, 그 결과 다수 여론조사 결과를 종합한 미 정치전문매체 더힐의 28일 분석에서 트럼프의 당선 확률은 54%로 올라갔다. 지난 17일 해리스와 처음으로 동률을 이룬 뒤 격차는 계속 벌어지는 추세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 나온 '푸에르토리코 발언'은 트럼프에게 악재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실제 더힐은 흑인 인구 비율이 높은 경합주 노스캐롤라이나를 ‘트럼프 우세’ 지역으로 분류했다가, 푸에르토리코 발언으로 소수 인종의 반발이 거세지자 이날 노스캐롤이나의 판세를 재차 ‘경합 지역’으로 재분류했다. 트럼프가 짧은 시간 해리스를 따라잡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소수 인종의 표심 변화는 판세를 빠르게 바꿀 수 있다는 의미다.
이 때문에 해리스는 푸에르토리코 이슈의 휘발성을 더하는 데 주력하는 분위기다. 해리스는 “푸에르토리코 주민은 자신들을 믿고 투자하는 대통령이 필요하다”며 목소리를 높였고, 캠프는 힌치클리프의 발언을 담은 광고를 긴급 제작해 펜실베이니아를 중심으로 한 푸에르토리코계 유권자 밀집 지역에 방영했다.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한 트럼프는 이날 펜실베이니아 유세에 앞서 플로리다 마러라고 자택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자청하고 “나보다 푸에르토리코에 더 많은 일을 한 대통령은 없었다”고 해명했다. 동시에 ABC 인터뷰에선 “그 코미디언은 모르는 사람”이라고 선을 그으며 진화에 나섰다.
미국 내 푸에르토리코 출신 이주민은 600만명으로 히스패닉계 중에서는 멕시코 출신에 이어 두번째로 많다. 특히 경합주 중 가장 많은 19명의 선거인단이 걸린 펜실베이니아에만 40만명 이상이 거주하고 있다. 다만 대선까지 남은 기간은 5일에 불과하고, 이미 사전 투표를 마친 비율이 높아 돌발발언의 영향력이 제한적일 수도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