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는 중국 전기차 고관세, 미국은 대중 기술투자 통제
새 무역 질서 대응 전략 짜고 기술 역량 제고 전력하길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1992년 기념비적인 저작 『역사의 종언』에서 1989년 냉전 종식을 ‘역사의 종언’으로 선언하며, 정치 체제와 경제 제도의 경쟁은 역사적 경험을 통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승리로 결론이 났다고 밝혔다. 분업화를 통한 자유무역의 확산은 경제 성장의 동력이 되는 동시에 국가 간 상호의존성과 연계를 강화하며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는 기제로 작용해 온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보호무역주의와 자국 우선주의가 거세어지면서 국제질서를 지배했던 이들 논리가 위협받고 있다. 테드 픽 모건스탠리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29일 “‘역사의 종언’ 시대도 끝났다”며 “지정학적 문제가 다시 돌아왔고, 앞으로 몇십 년간 주요 과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지머니와 제로금리, 제로 인플레이션 시대가 끝났다고 주장하면서다. 미·중 무역 갈등이 고조되고 인플레이션 압력이 커지면 중앙은행이 저금리 정책을 펼치기 어렵다는 의미다.
실제 보호무역의 장벽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유럽연합(EU)은 어제부터 중국산 전기차에 5년간 확정적 상계관세를 부과했다. 기존 일반관세(10%)에 추가 관세(7.8~35.3%포인트)가 더해진다. 중국산 전기차에 최고 45.3%의 ‘관세 폭탄’이 떨어진다. 정부 보조금 등으로 저가 공세를 펼치는 중국산 전기차를 막기 위한 조치다. 앞서 미국 정부는 내년부터 반도체와 양자컴퓨팅·인공지능(AI) 등 최첨단 기술과 관련한 미국 자본의 중국 투자를 통제하기로 했다. 중국의 기술패권 강화를 견제하려는 목적이다.
보호무역과 자국 우선주의로 시장경제의 근간인 자유무역이 흔들리는 건 수출과 무역으로 먹고사는 우리에게는 국가적 위협이다. 중국 견제를 위해 미국이 동맹국 중심으로 반도체 공급망 구축에 나서며 생긴 반도체 분업 체제 균열의 충격파는 이미 나타나고 있다. 1~9월 메모리 반도체 수출에서 중국 비중이 12년 만에 40% 아래로 떨어졌다. 중국산 전기차에 대한 EU의 고관세 조치가 가져올 손익도 미지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선후보는 외국 기업에 대한 반도체 보조금 폐지와 대중 고율 관세 부과를 공언하고 있다.
격화하는 보호무역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위기를 돌파하려면 새롭게 짜일 무역 질서에 대한 방어와 함께 이를 시장 재편의 기회로 삼을 중장기 전략을 짜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무역 장벽도 뚫어낼 제조 기술의 역량을 높여 첨단 기술의 초격차를 유지하려는 노력이다. 이를 위해서는 기업의 연구개발 및 투자, 정부 지원, 국회 입법이 함께 가야 한다. 각자도생, 약육강식의 쓰나미 앞에 긴장을 조금이라도 늦추면 도태는 시간문제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