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는 더이상 이 나라의 주류가 아니다. 보수와 진보가 대등하게 분포하는 연령층은 과거엔 50대로, 지금은 60대로 올라갔다. 586세대 다수가 이제는 60대. 이른바 ‘코호트 효과’에 의해 그들은 나이가 들어서도 보수화하지 않을 게다.
결국 보수엔 7080세대만 남게 된 셈이다. 거기에 잔혹한 자연사까지 개입한다. 총선 한번 치를 때마다 보수 유권자는 100만 명씩 준다고 하지 않는가. 과거엔 호남이 고립되었으나 지금은 외려 TK 지역이 고립되어 버렸다.
민심에게서 고립 자초하는 용산
‘돌 맞아도 갈 길 간다’ 변화 거부
고작 특별감찰관 놓고도 다투나
국민의 분노가 끓어올라도 태평
지지층의 협소화는 이념의 우경화로 이어진다. 미래의 전망을 잃은 보수. 좋았던 과거의 추억을 먹고 살 수밖에. 누구는 어디에 근사한 이승만 기념관을 짓겠다고 하고, 누구는 역광장에 거대한 박정희 동상을 세운다고 한다.
광화문 광장에 100m 높이 국가상징물을 세우겠다는 얘기도 있었다. 이 메갈로마니아는 일반적으로 독재정권의 미학적 취향이다. 이게 다 지지를 받겠다고 하는 짓이니, 그들이 소구하는 지지층의 범위를 짐작할 수 있다.
국책기관의 장은 국회에 나와 버젓이 ‘일제 강점기에 조선인의 국적은 일본이었다’고 말한다. 우리와 국가공동체의 기억을 공유하지 못하니, 국민의 눈엔 어디 멀리 떨어진 이념의 은하에서 이주해 온 외계인 집단으로 보일 수밖에.
이 고립은 정치에서 두 가지 방향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대통령실과 ‘민심’의 분리다. 지지율 20%는 내각제 국가에서라면 의회를 해산해야 할 수치. 그러니 야당도 거리낌 없이 ‘탄핵’ 운운하며 극단을 치닫고 있는 게다.
둘째는 여당과 ‘당심’의 분리. 당원의 압도적 다수가 정치 초보를 대표로 선택한 것은 그 말고는 딱히 대통령실을 바꿀 의지를 가진 인물이 안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세운 대표를, 당의 주류는 주저앉히지 못해 안달이 났다.
당은 당원들로부터, 정권은 국민들로부터 고립되었다. 그런데도 다들 태평하다. 대통령과 한 몸이 되어 여사 방탄의 한길로 나아가면 된다고 보는 모양이다. 지난 2년 반을 그렇게 지내다가 지지율이 20%로 떨어진 게 아닌가.
더 이상 그래선 안 된다는 건 지난 2년 반의 시간이 충분히 확인해 주었다. 역대 최저의 지지율로도 정신 차리기엔 부족한 모양이다. 생쥐도 시행착오를 통해 미로에서 길을 찾아내던데, 영장류가 설치류만도 못해서야 쓰겠는가.
‘돌을 맞아도 갈 길을 가겠다.’ 변화를 거부하는 대통령의 어조에선 결연함마저 느껴진다. 이를 말려야 할 참모들은 ‘인적 쇄신’ 요구에 반발해 집단행동까지 하려고 했다. 사실 20점짜리 성적의 참모들이라면 알아서 스스로 그만둘 일.
대통령은 원래 전광판을 보지 않는 분이시다. 축구에는 상대가 있고, 상대가 있으면 스코어가 나기 마련이다. 스코어보드를 보지 않고 싸우는 선수가 있다면, 아마 그는 목하 상대 팀이 아니라 관중과 싸우는 중일 게다.
‘대통령은 장님 무사, 여사는 장님 어깨에 올라탄 주술사’라던데, 결국 장님 무사의 어깨에 올라앉은 주술사를 당과 대통령실의 호위무사들이 감싸고 있는 셈이다. 이미 국민은 명태균의 비유를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상황이 이러한데, 당에서는 고작 ‘특별감찰관’을 놓고 다툰다. 인적 쇄신, 여사의 활동 중지, 여사의 사법 리스크 해소라는 3대 요구가 다 거절당한 마당에 ‘특별감찰관’인들 국민 눈에 차겠는가. 그런데 그걸 놓고도 싸운다. 심심한가?
국민의 분노가 가마솥을 끓이는데, 그 안의 개구리들은 태평하다. 솥 안의 분란만 없으면 모든 게 잘 될 거란다. 분란이라는 부정만 안 타면 승리를 보장해주는 무슨 부적이라도 갖고들 있는 걸까? 합리적으론 이해가 안 된다.
이 부조리의 유일한 설명은 그들이 집권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굳이 집권 안 해도 의원만 하면 되니, 좋은 지역의 공천을 좇아 줄이나 잘 서면 되지 않겠는가. 저 태평함은 오로지 이 처세술로만 합리적으로 설명된다.
모처럼 당의 중진들이 대통령에게 “결자해지”를 요구하고 나섰다. 그런데 이번엔 ‘주어’가 아니라 ‘목적어’가 없다. 결국 성명의 방점은 당 대표의 “리더십의 부재”에 찍혀 있는 셈인데, 그래도 다른 목소리를 낸 그 용기만은 가상하다.
다만 그런 소리 해도 되는 분위기를 만든 건 ‘리더십’ 없다는 그 사람이라는 점, 그 당엔 리더십만이 아니라 팔로어십도 없다는 점, 그리고 ‘결자해지’의 목적어를, 그 거룩한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었다간 자신들도 그 사람 꼴이 되는 점은 꼭 기억해 둬야 한다.
한편, 리더십이 부재하다는 그 사람은 리더십의 기초가 무한책임의 자세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7:1의 책임을 1:1로 바꿔놓은 백서가 맘에 안 들어도, “평가는 백서가 아니라 국민이 하는 것”이라 해서는 안 된다. 그 말은 국민의 입에서 나올 때만 자연스럽다.
진중권 광운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