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우석의 문화 단상

한글세대의 문해력 추락, 한자교육이 답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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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우석 영산대 명예교수

이우석 영산대 명예교수

한국인이 사용하는 언어인 한국어는 고유어(순수 우리말), 한자어, 외래어 등으로 구성돼 있다. 예컨대 ‘찬물’과 ‘헤엄’은 순수 우리말이고 ‘냉수’와 ‘수영’은 한자어인데, 모두 한국어로 분류된다. ‘버스’ ‘컴퓨터’처럼 외국에서 들어온 외래어도 있고 ‘버섯피자’와 ‘교통카드’ 같이 여러 요소가 섞여 있는 혼종어도 있다.

이처럼 한국어는 다양한 단어들이 어휘체계를 이루고 있다. 특히 한국어 단어의 약 70%는 한자로 구성된 한자어가 차지한다. 한자는 하나하나가 뜻이 있는 표의문자이기 때문에 한자로 표기된 한자어를 보면 단어의 뜻이 쉽게 파악이 된다. 무엇보다 문해력(文解力), 즉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을 키우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

한국어 단어 약 70%는 한자어
한자 몰라 언어생활에 큰 불편
한자교육 강화해 어휘력 키워야

그런데 이 한자어를 한자가 아닌 한글로만 표기하는 한글전용(專用)정책에 따라 지금의 한글세대는 한자 지식이 턱없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막연한 거부감도 상당하다. 이에 따라 자연히 어휘력과 문해력이 떨어지는 부작용이 크다. 한글세대는 어떻게 보면 한자 교육 부재에서 오는 선의의 피해자다.

한글세대, 한자교육 부재의 피해자들

김지윤 기자

김지윤 기자

최근 언론에서 혼숙(混宿)을 ‘혼자 숙박’으로 알고, ‘우천시(雨天時) 행사 취소’에서 ‘우천시(市)가 어디?’로 묻는다는 기사를 보고 실소를 넘어 가슴이 아팠다. 위증교사(僞證敎唆)를 ‘위증을 가르치는 교사(敎師)?’라는 농담을 들을 때는 웃음보다 한숨이 나온다.

한자세대인 필자조차도 한글로 표기된 ‘노조 전임자’에서 전임자(專任者)를 전에 노조에 근무한 적이 있는 전임자(前任者)로 오해하고, ‘다문화 센터’에서 다문화(多文化)를 ‘전통 차(茶)’를 마시는 곳으로 잘못 안 적이 있다. 이러한 오해와 소통 부재는 한글전용정책에 따라 한자어를 한자가 아닌 한글로만 표기하도록 규정한 데에 기인한다.

1948년 한글전용법이 제정된 이래로 한글전용론과 한자혼용론을 놓고 논쟁하면서 한국어 문자정책이 수없이 바뀌었다. 1970년 이후 한자는 교과서에서 잠시 사라졌다가 1975년부터 괄호 속에 보조적으로 병기하는 형태로 다시 등장했다. 한자를 잘 모르는 학생들에게 괄호 속에 병기된 한자는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또한 1972년에 제정된 ‘한문 교육용 기초한자 1800자’도 국어 시간이 아닌 한문 시간에 극히 일부분만 가르칠 뿐 학교에서 한자 교육은 매우 빈약하다.

이에 반해 일본은 1946년 당용한자(當用漢字) 1850자를, 1981년에 상용한자(常用漢字) 1945자를 선정해 사용해왔다. 2010년에는 신상용한자(新常用漢字)를 2136자로 확대 개정해 법령과 공용문서는 물론 신문·방송·잡지 등에서 일본어 표기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지난 11일 일본 주요 조간신문 1면의 모습. 가나와 한자가 함께 쓰이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1일 일본 주요 조간신문 1면의 모습. 가나와 한자가 함께 쓰이고 있다. 연합뉴스

일본은 자기 나라의 가나(かな) 문자가 있음에도 한자를 적절하고 편리하게 일상생활에서 활용하고 있다. 한자의 필획(筆劃)이 복잡한 번체자(繁體字)를 쓰던 중국은 1964년부터 한자의 약자화 정책에 따라 간체자(簡體字)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1986년부터 간체자 2253자가 통용되고 있다.

공교육기관인 학교에서 한자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지 50년이 지난 지금 한국의 언어 현실은 어떠한가. 한자를 읽고 쓰는 능력이 크게 부족한 한글세대가 우리 사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한자 교육의 부재로 인해 단어의 의미 파악이 잘 안 될 뿐 아니라 문해력도 매우 약하다.

대학진학 뒤 한자어 몰라 고생
중고교 과정에서 한자를 충실하게 배우지 않으면 대학에 진학한 뒤에 깊이 있는 학문을 연구하는 단계에서 뒤늦게 한자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고생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법령과 과학기술·의학 분야에서는 한자로 된 전문용어가 많이 등장하는데, 이들 한글세대에는 큰 부담이다. 예컨대 ‘허리 디스크’란 의학 용어에서 디스크, 즉 추간판(椎間板)이라는 단어는 한자만 알면 바로 ‘척추 사이의 판’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글전용론과 한자혼용론은 지금 우리 사회의 정치적인 이념 논쟁과는 다르다. 한국어에서 한자어는 엄연히 고유어·외래어·혼종어와 함께 어휘 체계의 한 축을 이룬다. 한자어는 한자로 표기해야 그 효용성이 제대로 나타난다. 이는 알파벳을 활용해 영어를 표기하는 이치와 같다. 영어 교육이 희망자에게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듯이 한자 교육도 마찬가지다. 학교에서 한자 교육을 대폭 강화해 학생들의 어휘력과 문해력을 키워줘야 두고두고 유용할 것이다. 충실한 한자 교육을 통해 국민의 지적 수준이 높아지면 금상첨화(錦上添花)일 것이다.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우석 영산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