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 파병된 북한군이 우크라이나 본토에도 진입했다고 미국 CNN이 29일(현지시간) 보도했다. 한·미 정보당국은 "아직까지 관련 정보가 없다"는 입장이지만, 만약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북한군 활용' 범위가 우크라이나 본토까지 확대된다면 2년 8개월동안 이어진 우크라이나 전쟁이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될 것으로 보인다.
쿠르스크 탈환 넘어 본토용까지?
북한군이 우크라이나 내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CNN 보도는 그간 한·미 당국의 발표에서 한발 더 나아간 내용이다. CNN은 두 명의 서방 정보 당국 관계자를 인용해 "소수의 북한군이 이미 우크라이나 안에 들어가 있다"며 "북한군이 러시아 동부에서 훈련을 마치고 전방으로 이동하고 있어 규모가 더 늘어날 것"이라고 보도했다.
한·미는 일단 신중한 입장이다. 국방정보본부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정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파병된 북한군이 전선에 투입돼 있다는 정확한 정보는 아직 없다"며 "일부 선발대가 전선에 투입됐을 개연성은 있어 보인다"고 보고했다고 여야 정보위 간사가 전했다. 이와 관련,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도 "그 이상 수준으로 진전된 내용은 공식적으로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북한군이 결집하고 있는 러시아 서남부 쿠르스크주는 원래 러시아 영토인데, 우크라이나가 일부를 점령하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가 자국 영토인 쿠르스크를 탈환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다음 단계로 우크라이나 점령지를 넓히는 목적으로 북한군을 활용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진다.
양욱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북한군이 파병된 이상 우크라이나 땅을 본격적으로 뺏는 데 동원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며 "러시아 입장에선 쿠르스크 탈환은 필수며, 더 나아가 도네츠크의 격전지인 아우디이우카-포크로프스크 축선까지 이르는 전선에서도 북한군을 동원하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에 배치되는 북한군의 규모도 급격히 늘어나는 분위기다. 국가정보원은 29일 국회 정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연말까지 1만 900명의 북한군이 러시아로 넘어갈 수 있다고 보고했는데,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30일 "이미 실행된 북한군 파병 규모가 최소 1만 1000명 이상"이라고 밝혔다. 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 영토에 대한 방어 진지 구축, 우크라이나 주요 도시 포위 작전 등에 포괄적으로 북한군이 동원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유럽에 대한 공격'에도 가담
가정적 상황이지만 우크라이나 본토를 북한군이 밟는다면, 유럽 일부를 침공하는 데 관여했다는 의미가 된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와 유럽연합(EU)의 대응도 본격화할 수밖에 없다.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은 지난 28일(현지시간) 한국 정부 대표단의 브리핑을 받은 뒤 "북한 병력이 쿠르스크에 배치됐다"고 공식 확인하며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 강화에 대해 논의했다"고 밝혔다.
북한이 불법 대러 무기 지원에 더해 파병을 통해 유럽 안보를 직접 위협하고 있다는 점에서 EU 차원의 대북 제재 강화 등 실질적 압박 조치가 나올 수 있다. 지난 9월까지만 해도 북한은 코로나19 이후 평양 공관을 철수했던 유럽 국가들을 상대로 공관 재개 협의 중이었는데, 이런 인적 교류 논의부터 전부 멈출 수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더라도 '북한이 유럽 일부를 침략한 공범'이라는 점에서 유럽 국가들의 향후 대북 정책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지난 6월 북한과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 조약'을 체결하고 군사 지원에 대한 나름의 법적 근거를 만든 러시아조차 외국군을 끌어들인 데 대한 국제적 비난 등 정치적 부담은 피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게임 체인저'급의 파급력을 알기 때문에 북·러 또한 북한군을 대규모로 우크라이나 본토에 투입하는 데는 신중할 거란 관측이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러시아 땅인 쿠르스크에 들어가는 건 최소한도의 명분이라도 있지만, 우크라이나 내부까지 진입하는 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라며 "따라서 북한군은 실제 우크라이나 내 전투를 직접 수행하기보다는 후방에서 러시아 병력 수급에 숨통을 틔워주는 데 무게를 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오경섭 통일연구원 연구위원도 "북한군이 동부 돈바스 지역까지 투입될 가능성은 현재로서 낮다"며 "러시아가 돈바스 방어에 집중하다 보니 생긴 전력 공백을 메우고 우크라이나군을 러시아 영토에서 밀어내 전황을 역전시키기 위해서 북한군을 투입한 것으로 관측된다"고 말했다.
유엔 규정 '침략행위' 공범으로
유엔은 이미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유엔 헌장과 국제법을 정면으로 위반한 침략(aggression)으로 규정했다. 이에 가담한 북한군의 파병 또한 국제법과 유엔 헌장에 자동으로 위반된다.
여기서 더 나아가 북한군이 우크라이나 본토에 투입된다면 파병의 결정권자인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푸틴의 '전쟁 범죄'에 기여한 공범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ICC의 설립 근거인 로마규정 25조는 "범죄의 실행을 용이하게 할 목적으로 '범행수단의 제공'을 포함해 범죄의 실행이나 실행의 착수를 '방조·교사'(aids and abets) 또는 달리 '조력'(assists)한 경우"에 대해 개인의 형사 책임을 인정하고 있다.
앞서 국제형사재판소(ICC)는 지난해 3월 푸틴에 대해서도 우크라이나 점령지에서의 아동 불법 이주 등 전쟁 범죄 혐의를 적용해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이어 지난 6월 세르게이 쇼이구 전 러시아 국방장관과 발레리 게라시모프 참모총장에 대해 민간인 공격 지시 등 전쟁범죄 혐의를 적용해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다만 김정은을 ICC에 제소하기 위해선 보다 정교한 법적 논리와 명확한 증거가 필요하다. 단순히 북한군이 러시아 혹은 우크라이나 영토에 머무르는 걸 넘어 민간인 살상 등 범죄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려는 분명한 의도를 갖고 무기 제공과 파병을 했다는 증거를 확보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