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풍수대가가 예언한 ‘포철’
사나이는 태어나서 세 번 운다고 한다. 나도 세 번을 울었다. 가장 최근에는 포철 때문에 오래 집을 떠나 있던 나에게 결혼을 앞둔 맏딸이 보내온 “신문이나 TV를 보고서야 아빠의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어요…”라는 두툼한 편지를 읽고 나서 눈물을 흘렸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소식에 또 한 번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으며, 철이 든 뒤 처음 눈물을 흘렸던 곳은 벌건 쇳물을 처음으로 콸콸 토해내던 포철 용광로 앞이었다. 이제 내 인생의 원형질이라 할 수 있는 포철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야겠다.
돌이켜보면 포항제철의 입지 선정은 그야말로 비정치적이고 객관적으로 결정됐다.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가 용역을 맡았던 후보지는 다섯 곳이었다. 영일만 북쪽의 월포와 포항·울산·삼천포·보성 등이다. 포항과 삼천포가 마지막까지 각축을 벌였다. 최종 발표는 1967년 6월 하순으로 잡혔다.
항간엔 삼천포가 유력하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해 6월 총선에서 공화당 중진의원인 삼천포의 김용순 후보는 제철소 유치를 제1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러나 보름 뒤 부지조성·공업용수·항만·전력 등에서 1위를 차지한 포항으로 결정되자 김 의원은 삭발 소동까지 벌였다.
일찍이 찬란한 신라 문화의 젖줄이었던 남한 10대 하천 중 하나인 형산강. 그 하구의 오른쪽, 한반도에서 해를 가장 먼저 맞이하는 영일만(迎日灣) 안쪽의 아늑한 모래벌판은 ‘연오랑 세오녀’ 설화의 무대다. 이곳이 포철이 들어설 자리라고 예언한 오래된 시(詩)가 있다. 조선후기 풍수지리의 대가인 이성지가 남긴 시다.
竹生漁龍沙(어링불에 대나무가 나면)
可活萬人地(수만 사람이 살 만한 땅이 된다)
西器東天來(서양 문명이 동쪽 나라로 올 때)
回望無沙場(돌아보니 모래밭이 없어졌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