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찌 사진전 '두 개의 이야기' 인터뷰 - ② 개념 미술가 김수자
이탈리아 럭셔리 브랜드 구찌가 한국 문화예술 거장 4인을 조명하는 캠페인 및 사진전 ‘두 개의 이야기: 한국 문화를 빛낸 거장들을 조명하며’ 를 공개했다. 사진가 김용호의 시선으로 개념 미술가 김수자, 영화감독 박찬욱, 현대 무용가 안은미, 피아니스트 조성진 등 한국적 정체성을 세계에 알린 예술가의 문화적 배경을 탐구한 프로젝트다. 더 하이엔드가 네 사람을 차례로 만나 사진 속 이면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실로 천을 엮고 매듭 묶어 감싸는 보따리를 통해 삶과 예술을 연결해 온 ‘보따리 작가’, 스스로 바늘이 되어 세계 각지의 문화와 맥락을 엮는 ‘바늘 여인’, 물질적 세계에서 비물질적 영역까지 사유의 스펙트럼을 확장하고 보듬는 ‘시대의 예술가’... 미술가 김수자는 끊임없이 마주한 세계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는 사람이다.
1970년대 말부터 회화의 평면성과 세계의 구조에 대해 고민해 온 그의 작업은 바느질로 이어졌다. 바늘과 직물이 엮이며 이뤄내는 수직·수평의 질서는 세계의 구조를 이해하는 문이 되었다. 바느질의 운동성과 천으로 감싸는 형태는 ‘연역적 오브제’ 시리즈로 확장되었고, 이후 작가는 보따리를 하나의 건축으로 보고 작업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베니스의 ‘푼타 델라 도가나’와 파리 라파예트 백화점 원형 돔 글라스에 설치한 오방색 스테인드글라스는 관객의 움직임에 따라 나타났다 사라지는 무지갯빛 광경을 연출했다.
김용호 사진가가 열반의 든 경지, 초월한 상태인 ‘피안’을 주제로 김수자 작가의 초상을 담아낸 것도 그가 겪었을 고뇌의 시간에 대한 찬사일 것이다. 김수자 작가는 지난 1998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와 2013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에서 한국을 대표했고 구겐하임 펠로우십(2014), 프랑스 문화예술 훈장(2015~17), 호암상 예술상(2015) 등 다수 수상하며 바느질·보따리·달항아리·오방색 등 우리나라 전통에 입각한 사유의 세계와 독자적인 예술 언어를 국제 무대를 통해 선보여왔다.
“손은 감각과 사유를 기술하는 흥미로운 기관”
–김용호 사진가가 ‘김수자 선생은 구도자로 다가온다’고 표현했는데, 사진 구도나 아이디어 등 제안을 주고받았나.
“김용호 선생이 찍고 싶으신 자세가 몇 개 있다고 알려주었지만 원래 무엇을 미리 계획하고 일을 하는 타입이 아니기 때문에 일단 카메라 앞에 앉았다. 막상 촬영이 시작되니 손이 근질근질해졌고 평소처럼 손의 퍼포먼스가 나오게 됐다. 김 선생도 손 작업을 해 오셨고 나도 해 온 터라 서로 의견의 일치를 보게 된 것 같다.”
–말씀대로 얼굴 사진 외에 ‘생각하는 손’이라는 작품이 등장한다.
“손은 각기 따로 고요히 놓여지기도, 함께 움직이며 한 손이 다른 손에 맞닿기도 한다. 두 손을 얹고, 엮고, 지시하고 교차시키기도 하고 얼굴이나 몸의 특정 부위를 감싸거나 지탱하거나 쓰다듬기도 하며 나름 사유하는 창조적 도구의 역할을 한다. 손은 필연적으로 뇌신경과 연계되어 감각과 사유를 자동 기술하는 매우 흥미로운 몸의 언어기관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손의 심리 작용에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었고, 손에 관한 필름이나 조각을 제작하기도 했다. 손의 표현법을 내 사진으로 선보이게 된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이번 ‘구찌 문화의 달’ 프로젝트는 ‘한국 문화에 대한 경의를 표하기 위해’ 꾸려졌다.
“일단 브랜드의 프로모션 접근법이 감각 있고 격이 있다고 생각했고, 더욱이 적지 않은 금액을 각 참가자가 추천하는 의미 있는 국제 비영리단체에 구찌 이름으로 기증하고자 한다고 했을 때 상업성을 넘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앞에 던져지는 질문에 답을 하는 사람”
–지난 9월까지 파리 부르스 드 코메르스 피노 컬렉션 미술관에서 열린 ‘흐르는 대로의 세상’ 전시에서 예술가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카르트 블랑슈’를 부여받고 작업했다. 피노 컬렉션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셈인데 어떤 부분에서 공감을 얻은 것인지 궁금하다.
“피노 컬렉션은 2001년 모마 PS1에서 열린 개인전 때 메인 작품 중 하나인 ‘바늘여인(1999~2001)’을 전 세계에서 제일 먼저 알아보고 소장해 주었던 곳이다. 이후 피노 컬렉션에서 이 작품을 몇몇 나라의 컬렉션 전시에 선보여 왔다.
퐁피두 메츠 개인전, 메츠 성당 스테인드글라스 영구 설치, 프와티에 도시 프로젝트 등 수많은 작업을 함께 해 온 큐레이터 엠마 라비뉴가 피노 컬렉션의 CEO가 되면서 이 프로젝트의 논의가 시작되었다. 그가 처음 로툰다 공간을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작가가 나였다고 한다.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명징하게 리노베이션한 아름답고 장엄한 로툰다 공간과 이를 둘러싼 24개의 유리장, 지하 공간과 오디토리움까지 … 전적인 책임을 갖고 이곳에서 작업을 펼치고 문맥화할 수 있는 것은 작가로서 흔치 않은 기회였다. 또한 작가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존중이기에 영광스러운 초대였다고 할 수밖에.”
–이곳에서 돔의 벽화를 180도 뒤바꾼 모습을 연출했다. 이는 상면과 하면을 만들어 합치는 달항아리의 제작 방식으로도 연결된다.
“돔과 프레스코 벽화를 지탱하는 로툰다 공간을 보자마자 둥근 바닥에 거울을 깔아 공간에 전체성을 부여하고 그 아름다움을 확장하고 싶었다. 돔의 유리를 필름을 싸서 무지갯빛 색을 연출하고 거울을 통해 엄청난 반사 효과를 보일 수도 있었지만 과거 작업과의 변별성을 주고자 했고 모든 ‘색’을 제거해 내 작업의 현재성을 보여 주고자 했다. 24개의 유리장에는 예전에 작업한 오브제들을 설치했는데, 2019년 달항아리를 보따리 컨셉트로 치환한 ‘연역적 오브제-보따리’ 시리즈와 백자 비스크 시리즈도 포함되어 있다. 돔과도 같은 형태인 두 개의 작은 스케일의 작업이 맞물리면서 내게는 달항아리 형태의 보따리가 건축적인 돔으로 읽히기 시작했다.”
–보따리라는 실체가 있는 오브제에서 비물질적인 개념 미술까지 작업 영역을 확장해 왔다.
“나의 비물질적 작업의 근간은 결국 바느질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다. 건축을 보따리로 보는 순간 더욱 ‘비물질적 보따리’가 되었다고 보는데, 여기에 물질이 전혀 부재한다고 볼 수는 없다. 단지 대상화되는 오브제가 없는 것뿐이다. 끊임없이 물질을 질문하다 보면 결국 비물질을 만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이것은 우리의 육신과 정신의 관계와도 동일 선상에 놓여있다고 본다.”
–예술가로서 시도해 보고 싶은 국제적 규모의 작품이 있다면.
“나는 무엇을 실현하기 위해 욕망하기보다는 주로 나에게 던져지는 질문들에 답하며 작업을 해 왔기 때문에 주어지지 않는 것에 대해 생각할 여유는 그리 없다. 앞으로도 하나하나 나에게 주어지는 공간이나 시간, 그 질문들에 최선의 솔루션을 찾는 일로 시간을 보낼 것 같다.”
–앞으로 어떤 작품을 볼 수 있나.
“내년에 두 개의 특별한 공간이 나에게 주어졌다. 하나는 암스테르담의 가장 오래된 건물인 구 교회에서의 설치 작업 프로젝트이고, 다른 하나는 베네치아의 산 조르지오 마조레 성당에서의 프로젝트다.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두 프로젝트가 거의 동시에 베네치아 건축비엔날레 기간에 개최될 것이고, 이를 통해 특별한 경험을 관객에게 선사하고 싶다.”
–작가로서 혹은 개인으로서 요즘 관심 있는 것은.
“뉴욕에서 허리케인 샌디를 경험하고 나서 2013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에 어둠과 무지에 대해 질문하는 작업을 선보였다. 당시 어두운 무반향실 공간과 빛의 공간을 대비해 보인 이후 어둠에 대한 질문은 계속 진행 중이다. 최근 빛을 거의 모두 흡수하는 안료가 개발되었는데 이를 사용한 검은 조각 혹은 회화에 빠져 있다. 빛의 세계에서 어둠의 세계로 더욱 깊이 들어가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