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에서 본 한강
“우리 딸이 언젠가는 (노벨 문학상을) 받을 줄 알았어요. 이름처럼 크게 됐네요.”
원로작가 한승원(85)이 11일 전남 장흥군 자택에서 한강(54)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에 밝힌 소감이다. 그는 “내 생전에 딸이 노벨상을 받았으면 했는데 받아서 기쁘다”며 “딸이 등단했을 당시 첫 단편 글을 보고 ‘나를 이미 뛰어넘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한승원은 고향인 전남 장흥군 안양면 사촌리 ‘해산토굴’에서 부인과 함께 거주하며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해산토굴은 한승원 작가의 작업실이자 거주 공간이며 ‘해산’은 그의 호다.
한승원은 “강이 소설에는 (우리 세대) 작가에게 없는 신화적인 것, 문화인류학적인 그윽한 정서가 있다. 문체가 아주 아름답고 섬세하다”며 “전통적인 리얼리즘을 이어받아 섬세하게 묘사하는 힘이 뛰어난 데다 신화적이고 문화인류학적인 정서를 강하게 표현한 게 서구 심사위원을 매료시켰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우리 세대 작가는 발자크 같은 유럽 소설가의 영향을 받아 리얼리즘 소설을 주로 쓰는데, 리얼리즘 소설은 저항 소설이고 다큐멘터리 같은 소설”이라며 “그런 소설은 유럽에 많이 있는 것이니까 (주목받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냈는데 한강은 새로운 문체를 서구에 선보여 호평을 받게 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그 사람(딸)의 언어와 내 언어는 다르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와 『희랍어 시간』을 읽어보면 시적인 감성이 승화된다”고 평했다. 2016년 5월 한강이 한국 최초로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했을 때도 그는 “(한강은) 나를 뛰어넘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깜짝 놀랄 때가 많다”고 했다.
한승원은 “한강처럼 큰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한강으로 이름을 지었다”며 “그런데 어릴 때 ‘낙동강, 대동강’ 등으로 놀림을 받은 탓인지 등단할 때는 뒤에 ‘어질 현(賢)’ 자를 붙여서 ‘한강현’이라고 응모를 한 기억이 난다. 이름처럼 크게 된 것 같아 기쁘다”고 말했다.
한승원은 또 딸이 노벨 문학상 수상에 공식적으로 기쁨을 표하거나 기자회견을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죽음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한강이) 러시아·우크라이나·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에서 날마다 사람이 죽어 나가는 데 무슨 잔치를 하고 기자회견을 할 것이냐”며 “기자회견을 안 할 것이니 양해해 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한강의 어머니 임감오(83)씨도 “수상 소식을 듣고 너무 기뻐서 잠도 못 잤다”며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아침 운동을 가는데 오늘은 심장이 뛰어서 운동도 못 나갔다”고 말했다. 임씨는 “노벨 문학상을 받은 것을 딸에게 들은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전화를 받고 알았다”며 “처음에 남편은 ‘가짜뉴스 아니요
한승원은 1968년 등단해 장편소설 『아제아제바라아제』 『초의』 『달개비꽃 엄마』와 소설집 『새터말 사람들』, 시집 『열애일기』 『달 긷는 집』 등을 펴냈다. 한승원 부녀는 ‘이상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강은 2014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를 펴내 광주의 아픔을 알렸다. 광주 출신인 한강은 어릴 때 간접적으로 겪은 5·18 당시 인간의 폭력성에 대한 고찰이 그의 작품 세계에 투영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강은 “아버지가 보여준 사진첩을 통해 19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 실상을 접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한강은 당시 경험에 대해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품게 됐다. 인생이 바뀌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한승원은 이상문학상 외에도 현대문학상·김동리문학상 등을 받았다. 그는 올해 1월에도 『사람의 길』(문학동네)을 펴내며 작가 활동을 지속해 왔다. 그는 이 책의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이 내 최후의 길”이라고 적기도 했다. 한강은 광주시 북구 중흥동에서 태어나 효동초등학교를 다니다 서울로 올라가 풍문여고와 연세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한강은 연세대 국문과를 수석 입학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