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9일 한국과 "영구적 국경 차단"에 나선다고 밝혔다. 남북 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관계'로 재정립하기 위한 조치의 일환으로, 한국과 연결된 도로와 철길을 끊고 "요새화 공사"를 진행하겠다고 선언했다. 북한은 이미 올 상반기 경의·동해선의 도로 및 철로를 철거했지만, 이를 공식화하고 군사적 조치와 병행한다는 점에서 무게감이 남다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남북을 '통일을 지향하는 동족'이 아닌 '교전 중인 적대국'으로 재정의한 가운데 향후 이를 본격적 행동으로 보여주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러면서도 북한은 최고인민회의(한국의 국회 격)를 열고도 이를 반영한 개헌 여부에 대해서는 일절 함구했다.
"영토 철저 분리" 군사 행동부터
북한은 이날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공개한 조선인민군(북한군) 총참모부 보도문에서 "공화국의 주권행사 영역과 대한민국 영토를 철저히 분리시키기 위한 실질적인 군사적 조치를 취한다는 것을 공포한다"고 밝혔다. 김정은이 지난해 12월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적대적 두 국가론'을 천명한 이후 조용히 남측과의 물리적 단절 조치를 추진해온 북한이 이를 처음으로 공식 확인한 셈이다.
구체적으로 총참모부는 "10월 9일부터 대한민국과 연결된 우리 측 지역의 도로와 철길을 완전히 끊어버리고, 견고한 방어축성물들로 요새화하는 공사가 진행되게 된다"며 "우리 군대가 제1의 적대국, 불변의 주적인 대한민국과 접한 남쪽국경을 영구적으로 차단, 봉쇄하는 것은 전쟁 억제와 공화국의 안전수호를 위한 자위 조치"라고 밝혔다.
아울러 "우리의 남쪽국경과 접경한 한국 지역에서 매일같이 동시다발적으로 감행되는 침략전쟁 연습책동이 전례를 초월"하고 있다며 "미국의 핵전략자산들이 때없이 출몰"한다고 했다.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 고도화에 대응하기 위한 한·미의 확장억제 강화 조치 등을 도발의 빌미로 삼는 궤변을 반복한 것이다.
총참모부는 또 "예민한 남쪽국경 일대에서 진행되는 요새화 공사와 관련하여 우리 군대는 오해와 우발적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의도로부터 9일 9시45분 미군 측에 전화통지문을 발송하였다"고도 했다.
요새화 자체가 전쟁 상태임을 전제로 하는 측면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김정은이 언급한 '교전 중'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방식으로 긴장감을 높이려는 의도일 수 있다. 수십 년 간 유지해온 남북관계의 틀 자체를 바꾸는데, 이를 정교하게 개념화하지도 않은 채 통상 가장 마지막 순서인 군사적 조치에 먼저 나선 것도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이와 관련, 노동신문은 이날 국방과학원이 전날 유도 기능을 적용한 240㎜ 방사포(다연장로켓포)의 성능을 검증하는 시험사격을 진행했다고 전했다. 사진 상으로는 지난 8월 검수시험사격 때 공개한 것과 동일 기종으로 보이는데, 실전 배치를 앞둔 개발 막바지 단계일 수 있다.
요새화 공언 北, 병력 상주시키나
이날 합동참모본부는 북한의 요새화 선언에 대해 "이미 비무장지대에서 정전체제 무력화를 획책해 온 북한의 이번 차단 및 봉쇄 운운은 실패한 김정은 정권의 불안감에서 비롯된 궁여지책에 불과하며, 앞으로 더욱 혹독한 고립을 초래할 것"이라며 "우리 군은 일방적 현상변경을 기도하는 북한의 어떠한 행동도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며, 이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사태의 책임은 북한에 있음을 분명히 경고한다"고 밝혔다.
관건은 북한이 공언한 '요새화'의 수위다. 이미 포착된 군사분계선(MDL) 일대의 지뢰 매설과 대전차방벽·철조망 건설 등을 지속할 것으로 보이는데, 추가적인 조치에 나설 가능성도 있다.
이와 관련, 북한은 김일성 주석 시기인 1962년 10월 헌법에 “전군 간부화, 전군 현대화, 전민 무장화, 전국 요새화”를 골자로 한 군사 전략을 명문화하면서 전방 주요 지역에 높이 4m의 구조물을 설치한 적이 있다.
군 당국은 북한군이 올해 초부터 MDL 10여개 지점에서 요새화 관련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파악했다. 북한이 10개 지점 등을 중심으로 군사력을 집중적으로 배치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또 개성공단 지역의 경우 북한이 최단거리로 남침을 감행할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다. 공단 조성 이전 수준으로 방호 시설을 부활하고, 군사적 이점을 살리는 방안이 요새화 방안에 포함됐을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북한이 2018년 남북 간 9·19 군사합의에 따라 철수했던 비무장지대(DMZ) 내 감시초소(GP, 북한 명칭은 민경초소)의 부활과 맞물려 병력이 상주할 수 있는 다목적 방호시설을 구축할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군 당국은 북한이 대전차방벽에 화기를 들여놓고 공격 거점으로 삼을 가능성도 살펴보고 있다고 한다.
'개헌 카드' 흔들며 타이밍 노리는 김정은
그러면서도 북한은 정작 김정은이 직접 지시한 '적대적 두 국가관계' 관련 개헌에 대해서는 아무런 내용을 밝히지 않았다.
노동신문은 이날 최고인민회의(14기 제11차)가 지난 7~8일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진행됐다고 보도했는데, 헌법 개정에 대해서는 ‘전반적 12년 의무교육제’ 실시에 따라 올해부터 달라진 고급중학교 졸업 나이에 맞춰 노동·선거 나이를 수정했다고 밝힌 게 전부다. 새 영토 조항, 통일 표현 삭제 등은 거론하지 않았다.
회의에는 정치국 상무위원인 김덕훈 내각 총리, 최용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이병철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을 비롯한 당·정·군 간부 등이 자리했다. 김정은은 참석하지 않았다.
북한이 헌법에 대해 "변화 발전하는 혁명의 요구, 인민의 지향과 이익에 부응한 조선노동당의 탁월한 국가건설 사상과 실천 강령" 명기 필요성을 언급한 만큼 관련 개헌을 진행하고도 공개하지 않았을 수 있다.
반면 아예 개헌 자체를 미뤘을 가능성도 있다. 홍민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만약 헌법이 개정됐다면 총참모부 입장에서 '공화국의 주권 행사 영역'이 아니라 '공화국 영토'라고 표현했을 수 있다"며 "통일 표현 삭제와 같은 중요 사항을 개정하고도 주민들에게 알리지 않았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개헌을 하고도 숨긴 것인지, 개헌 자체를 미룬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김정은이 '개헌 카드'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시점을 저울질 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미 대선이 불과 한 달도 남지 않은 가운데 한·미를 비롯한 국제사회가 이를 중대한 국면으로 인식하는 점을 최대한 활용하려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분석이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민심을 고려해 내부 설득과 선전선동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공개 시점을 저울질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