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혼자만의 겨울’을 맞고 있다. 인공지능(AI) 수요가 과장됐다는 ‘AI 거품론(論)’과 고대역폭메모리(HBM) 공급도 넘칠 수 있다는 ‘메모리 겨울론’이 한 차례 반도체 주가를 때린 뒤 물러갔지만, 삼성전자 주가만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4일 금융업계에 따르면 신한투자증권과 IBK투자증권은 잇따라 삼성전자 목표 주가를 11만원에서 9만5000원으로 내렸다. 최근 모건스탠리와 맥쿼리가 삼성전자 목표 주가를 각각 7만6000원과 6만4000원으로 기존보다 27%, 49% 내려잡은 데 이어 국내 증권사도 목표가를 14% 낮춘 것이다.
하향의 정도는 다르지만 이유는 비슷하다. 삼성전자의 3분기 매출이 예상치보다 낮을 거라고 봤다. 전 세계 스마트폰 수요는 정체되며, 한동안 올라갔던 일반 D램 메모리 가격은 내려가는데, 고가 메모리인 HBM 시장의 주도권을 삼성이 아직 잡지 못하고 있다는 이유다.
기온 차 큰데 ‘외투’ 없는 삼성
지난달 15일 모건스탠리 보고서가 주장한 메모리 겨울론은 삼성전자뿐만 아니라 국내외 메모리 반도체 업계 전체를 강타했다. 그러나 보고서의 HBM 공급 과잉 우려 부분이 과장됐다는 평가가 나오면서 충격은 사그라드는 듯 했다. 이후 지난달 25일 글로벌 메모리 3위인 미국 마이크론이 예상을 뛰어넘는 회계연도 4분기(6~8월) 호실적으로 주가가 급등했고, SK하이닉스 주가도 이후 20% 이상 올라왔다.
그런데 유독 삼성전자 주가만 ‘모건스탠리 충격’ 때보다 더 내려갔다. 7월만 해도 지난 2분기 호실적으로 ‘9만 전자’(주당 9만원 이상)도 바라봤지만, 8월 중순 8만원 이하로 떨어진 이후 줄곧 하락세다. 이제는 아슬아슬하게 ‘6만 전자’를 유지하고 있다(4일 종가 6만600원).
먼저 메모리 가격이 하락세로 돌아선 탓이 크다. 시장조사업체 D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지난달 PC용 D램 범용 제품의 평균 가격은 전월 대비 17%, 낸드플래시는 11% 하락했다. 지난해 10월부터 오르던 D램 메모리 가격이 지난 8월 소폭 하락했고, 9월엔 보다 큰 폭으로 가격이 내려갔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삼성전자가 고부가가치 메모리 시장에 적응하지 못한 탓 아니냐”라고 본다. 메모리 반도체는 주기적으로 업황을 타는 산업인데, AI용 메모리인 HBM은 일반 D램보다 고가일 뿐 아니라 수요 기반으로 생산해 계절을 타지 않는 품목으로 꼽힌다. 삼성은 대량 생산 설비를 앞세워 지난 2분기 D램 수요가 급증할 때 반도체로만 6조원 이상의 영업이익을 냈으나, HBM 시장에서는 여전히 존재감을 키우지 못했다. 이를테면, SK하이닉스는 날씨가 추워져도 몸을 보호할 HBM이라는 두툼한 외투를 갖췄지만 삼성전자는 D램 가격 변동에 맨몸으로 노출된다는 거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는 HBM 매출이 전체 D램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올해 20%, 내년 30%가량일 것으로 추산한다. AI 시장이 커질수록 HBM의 비중도 커지는 추세다.
여기에 ‘국장’의 고질도 겹쳤다. 미국 빅컷(금리 인하)과 중국 경기 부양으로 해외 각국 증시는 다 살아나는데, 한국 증시만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저평가된 한국 증시 때문에 삼성전자 주가가 저평가되고 대장주인 삼성이 힘을 못 쓰니 한국 증시에 악영향을 미치는, 이른바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모를’ 악순환인 셈이다.
삼성의 ‘방향’에 쏠리는 눈
HBM은 삼성전자 사업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지난 2분기 기준 메모리는 삼성전자 전체 매출의 29%를 차지했다. 회사는 공개하지 않지만 증권가에서는 D램 비중을 전사 매출의 15~17% 정도로 본다. 특히 삼성은 SK하이닉스나 마이크론보다 범용 D램 매출 비중이 높은 편이라, HBM이 회사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한 자릿수 초반대일 것이라는 분석이다.
그런데도 삼성 반도체 위기를 말할 때 HBM이 자꾸 거론되는 건, 추락한 반도체 거인 인텔의 모습이 겹쳐서다. 인텔은 중앙처리장치(CPU) 시장을 압도했지만, 지난 15년간 모바일·AI 전환 흐름을 읽지 못해 뒤처졌고 이제는 타사의 인수 매물로까지 거론되고 있다. 삼성전자도 여전히 D램 시장 점유율 세계 1위(42.9%)이지만, 물량보다 고객사와 긴밀한 소통이 필요한 HBM 시장을 소홀히 했다가 최근 대응을 강화하고 있다. 삼성전자 반도체 출신의 한 업체 대표는 “반도체 업계의 투자나 결정은 최소 5~6년 뒤에 빛을 보기에 삼성이 지금 혁신을 해도 가시적인 성과가 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라면서도 “방향이 주어지면 빠르게 움직이는 삼성 특유의 저력이 있기에, 방향만 잘 잡으면 된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