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오경아의 행복한 가드닝

구절초가 피었습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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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오경아 정원 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

오경아 정원 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

강아지풀 가득한 화단을 정리하니, 그 안에 피어난 구절초의 우윳빛 흰 꽃이 환하게 나타났다. 내가 식물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시절, 친정아버지가 돌보던 화단에 가을이면 늘 피어났던 식물이다.

뒤늦게 정원 공부를 시작하고, 나는 이상하리만치 처음 보는 식물의 이름과 형태를 잘 기억했다. 사람·가게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뇌 구조로서는 참으로 의아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건 착각이었다. 서울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지만 산 중턱에 위치한 학교 덕분에 나는 뒷산을 넘어 등교하곤 했다. 그때 친구들과 산을 넘으며 계절마다 피고 지는 나무와 풀을 봤다. 또 버스를 타러 가는 골목길, 집집마다 대문 위나 집 앞 화단에 이런저런 꽃을 피웠던 식물이 가득했다. 결국 내가 잘 기억한 식물은 절대 처음 본 식물이 아니었던 셈이다.

1949년 영국에서는 사람과 동물이 오랫동안 다녔던 길을 지도에 반드시 표시하게 하는 법령이 만들어졌다. ‘통행권’을 존중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사유지라 할지라도 지도에 ‘footpaths’가 표시돼 있다면, 그 길은 누구라도 걸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이후 이 통행권은 시골을 넘어 도시로도 확대된다. 런던 시내에 통행로가 정비되기 시작했고, ‘2012 런던 올림픽’을 기념해 2012개의 골목 정원도 만들어졌다.

최근 나는 도시 정원을 공부하다, 전 세계가 재생하려 애쓰는 이 정원 도시가 우리의 잃어버린 골목길과 닮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추억과 함께 떠오르는 골목길엔 분명 우리를 걷게 하고, 식물을 키우게 하고, 사회적 교류를 만들어낸 도시정원의 모습이 있다. 도시에 왜 정원을 만들어야 하나. 그 답은 단순하다. 이 가을 우연히 걷다 누구네 집 화단인지도 모르지만 마주하게 된 구절초 꽃이 예뻐 잠시 발길을 멈추고 미소 지을 수 있다면, 그걸로 우리가 꿈꾸는 도시정원의 목적은 충분하기 때문이다.

오경아 정원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