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영화 ‘서울의 봄’ 열풍이 있었다. 흥행을 주도한 것은 20·30세대였다. 그들 사이에서 영화를 보는 동안 분노로 치솟은 심박수를 SNS에 인증하는 챌린지가 유행했다. 진보 진영에선 그 열풍을 반기며 영화 속의 ‘전두광’을 윤석열 대통령에, 군사독재정부를 ‘검찰독재정권’에 투영하려 했다.
국회 과반 의결이면 계엄 해제 #80년대식 계엄은 이젠 불가능 #과거 벗어나 현실에 집중해야
당시 더불어민주당의 한 국회의원은 “내년 총선에서 여당이 승리하면 윤석열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할 것”이라며 “민주당은 ‘계엄 저지선’을 확보하기 위해 최소 단독 과반 확보 전략을 써야 한다”고 까지 말했다. 민주당은 총선에서 압승했고 계엄 저지선을 확보했다. 헌법과 계엄법에 따르면,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했을 때에는 지체 없이 국회에 통고해야 하고, 국회가 폐회 중일 때에는 대통령은 지체 없이 국회에 집회(集會)를 요구해야 한다. 또한 국회가 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계엄의 해제를 요구한 때에는 대통령은 이를 해제하여야 한다. 즉, 우리 헌법과 계엄법은 국회의 승인을 받아야만 대통령이 계엄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구속해뒀다. 따라서 야당이 계엄 저지선 의석을 확보하면 대통령의 계엄권은 사실상 무용지물이다.
야권 우려하는 계엄, 여당도 동의 안 할 것
더 나아가 민주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윤 대통령이 계엄권을 행사하기 어렵다. 국민의힘도 동의하지 않을 거라 보기 때문이다. 그들 입장에선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도 계속 정치를 해야 하고, 재집권해야 한다. 그래서 민주당이 계엄 저지선을 확보하지 못했더라도 국민의힘 의원들에 의해 계엄은 해제될 것이다.
그러나 민주당은 계엄 저지선을 확보하고도 뭔가 불안한가 보다. 얼마 전부터 윤석열 정부가 계엄을 준비하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더니, 급기야 ‘서울의 봄 4법’이라며 계엄의 선포 및 유지 요건을 강화하는 법안을 발의하고 이를 당론으로 추진하겠다고 한다. 대략적인 내용은 ‘재적의원 과반수 출석, 출석 의원 과반수 찬성을 충족해야만 계엄을 선포할 수 있도록 했고,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할 경우 72시간 이내에 국회의 사후 동의를 얻도록 하는 것’이다. 지금도 헌법과 계엄법에 따라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할 경우 즉시 국회가 집회를 하도록 요구해야 하고, 재적의원 과반이 해제를 요구하면 바로 해제가 되는데, 그게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일각에서는 국회의원을 체포·구금하여 국회가 열리지 못하게 만들 거라는 음모론도 제기된다. 하지만 우리 헌법과 계엄법에 국회의원은 회기 중엔 현행범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체포 또는 구금되지 않게 되어 있다. 계엄이 시행 중일 경우는 회기 중 여부와 무관하게 체포 또는 구금되지 않는다(계엄법 제13조). 게다가 체포 또는 구금되었다 하더라도 국회의 요구로 회기 중엔 석방할 수 있다. 즉, 무리한 방법으로 국회의원을 체포·구금해서 재적의원을 줄이고 계엄을 선포할 거라는 상상도 현실 가능성이 없다. 그런 시도를 한다면 그것은 엄연히 제도에 있는 ‘계엄’이 아니다. 헌정과 제도를 무시하는 사실상의 ‘내란’이 된다.
하지만 경제력 세계 10위권 안팎의, 세계 민주주의 지수 평가로 ‘완전한 민주주의’에 속하는 2024년의 대한민국에서 내란이 가능할 것인가. 설령 권력자가 그것을 원한다고 해도 국민의 ‘민도’가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현 정부에서 어느 학교 출신 지휘관 몇 명이 모임을 만든다고 그것이 ‘하나회’가 될 순 없다. 영화 서울의 봄에서도 묘사가 되듯 하나회는 장성과 하급 장교를 막론하고 꽤 오랜 시간 동안 군 전체에 형성되어 있던 카르텔이었다. 지금 그게 가능한가. 게다가 지금 군의 상황과 환경 자체가 70년대와 전혀 다르다. 예전처럼 군인들에게 정보를 통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가뜩이나 열악한 처우에 간부들이 군을 떠나는데, 초법적인 충성을 바칠 것 같지 않다.
정치권이 영화 서울의 봄 열풍에 편승해 아전인수식 논평을 내놔도 정작 흥행을 주도한 20·30세대는 그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현 정부는 군인들이 아니라 민주당을 심판하고 싶었던 국민이 직접 선거로 세운 정권이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정치권이 제발 1960년대에서, 그리고 1980년대에서 빨리 빠져나오기를 바란다.
여권의 반국가세력 공격도 시대착오적
대통령은 반국가세력이 도처에서 암약한다는 식의 어디 60년대 보수 정치인들이나 할 소리를 하고, 그런 시대착오적인 국정운영을 합리적으로 견제하고 시대에 맞는 대안을 제시해야 할 야당은 80년대 학생운동 하던 시절 구호를 외치고 있다. 그들이 지키려 하는 건 서울의 봄이 아니라 본인들의 젊은 날의 추억이다.
과거 보수진영에서는 걸핏하면 ‘종북’ 타령을 하며 ‘적화통일 환각’에 빠지곤 했다. 현실적으로 적화통일이 가능한가. 그러니까, 김정은이 대한민국을 운영할 능력이나 있는가. ‘불가능한 것’을 견제하느라 사회적 에너지를 낭비한다는 점에서, 지금 민주화 세력이 ‘계엄 환각’에 빠지는 것도 그와 비슷한 맥락이다.
색깔론과 북풍 전략이 실제 안보의 강화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 특정 지지층 결집의 효과만 발생하듯, 민주화 세력의 계엄 견제론 역시 더 나은 민주주의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 특정 지지층 결집의 효과만 발생한다. 정치권이 2024년의 대한민국이 해결해야 할 진짜 문제와 싸우는 대신, 각각 양극단에 가상의 적과 투쟁하는 스토리를 제공해 정치적 이익만 얻으려는 것이다. 정치권은 부디 과거의 환각에서 빠져나와 현실의 문제에 집중하길 바란다.
하헌기 새로운소통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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