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정현목의 시선

남의 고통과 불행을 소비하는 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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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정현목 기자 중앙일보 문화부장
정현목 문화부장

정현목 문화부장

중국 대도시의 한 고등학교. 학교폭력에 시달리던 여학생이 투신자살하자, 학생들이 단체로 주문에라도 걸린 듯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을 찍는다. 그들과 달리 시신에 옷을 덮어준 동료 여학생은 학폭의 새로운 제물이 된다. 중국 영화 ‘소년시절의 너’의 한 장면이다.

영화 ‘베테랑2’의 한 장면. 시신 발견 현장에 몰려든 사람들이 죄다 휴대전화를 꺼내 들고 처참한 장면을 찍어 댄다. 경찰이 막느라 안간힘을 쓰지만 역부족이다.

이들 장면을 보고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수개월 전 어느 화창한 주말, 한강공원에서 있었던 일이다. 수다를 떨던 젊은 남녀 중 한 명의 시선이 한 곳에 꽂혔다. 경찰의 익사체 수습 장면을 목격한 것이다. 그가 휴대전화로 찍자, 다른 이들도 약속이라도 한 듯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풍광이나, 연예인 사진을 찍듯 자연스럽게.

사고 현장 휴대폰 꺼내는 사람들
모두가 ‘고통의 중개인’이 된 세상
공감능력의 회복 위해 고민할 때

이태원 참사 때도 그랬다. 소방대원과 의료진, 시민들이 한 사람이라도 살리기 위해 응급처치에 나서는 와중에 어떤 이들은 휴대전화로 참혹한 장면을 찍어 SNS로 실어 나르기 바빴다. 도움의 손길 대신, 렌즈를 들이댄 이들에겐 남의 불행이 구경거리에 불과했던 걸까. 당시 소방당국 관계자는 사망자들의 사진을 찍는 사람들 때문에 현장 지휘가 더욱 어려웠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급발진 추정 사고를 당한 지인의 경험담도 있다. 젊은 여성이 돕기는커녕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길래 왜 찍냐고 물어보니, 퉁명스럽게 “신고하려고요”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태원 참사 때 참혹한 사진·영상을 퍼트려 비난받은 이들의 변명도 비슷했다. “제보하려고요.”

남의 불행과 고통을 구경거리 내지는 SNS의 ‘좋아요’를 늘릴 재료로 생각하는 이들이 왜 이리 많은 걸까. 기자 출신의 김인정 작가가 저서 『고통 구경하는 사회』를 통해 지적한 것처럼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를 발판 삼아 더욱 많은 사람이, 더욱 많은 사람을 향해 ‘고통의 중개인’이 되는 현실이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됐나. 남의 고통에 공감하는 인간다움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요즘 젊은이들은 스마트폰을 끼고 자라난 세대다. 어릴 때부터 서로 몸을 부딪치고 땀 흘리는 놀이를 하며 공감 능력, 사회성을 익혀야 하는데 스마트폰 화면에 몰입한 채 자라느라 그런 성장 과정을 박탈당했다. 『불안세대』를 쓴 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에 따르면,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자라난 요즘 젊은이들은 사회성이 거세 되고 공동체 의식이 역사상 가장 약한 ‘신인류’다.

신체 놀이 대신 스마트폰 중심의 유소년기를 보낸 아이들은 온라인 포르노·SNS·게임 중독에 빠지기도 한다. SNS에서 관심 끌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찍어 올리고, 음란 동영상에서 봐온 것처럼 이성의 신체 또한 성적 유희의 대상으로 치부한다.

이성을 인격체로 본다면 딥페이크, n번방 등 흉악한 디지털 성범죄를 저지를 수 없을 터다. 게임 중독자들에게는 타인이 언제든 소멸될 수 있는 게임 캐릭터로 보이고, 남들의 고통과 죽음 또한 가상체험 정도로 느껴지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리 스마트폰의 폐해가 심각하다 해도, 남의 불행에 ‘나는 괜찮다’며 안도하는 심리와 관음적 욕망이 존재한다 해도, 그걸 억누를 수 있는 건 공감 능력과 공동체 의식이다. 카메라 뒤 또는 모니터 앞에서 남의 고통과 죽음에 무감각해지거나, 눈요깃거리로 소비하는 구경꾼들이 넘쳐 나는 세상을 사람 사는 사회라 할 수 있을까.

눈앞의 고통 받는 이에게 스마트폰을 들이대기 전에 할 일은 지금 내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부터 생각하는 것이다. 구경꾼의 시선으로 사건을 목격했다 해도 이를 어떤 시선으로 봐야 할지, 불행이 반복되는 걸 막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함께 고민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남의 고통을 봐야 하는 이유이자, 인간이 괴물이 되는 걸 막아주는 길이 아닐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감 능력과 사회성의 회복을 위해 자녀들에게 너무 일찍 스마트폰을 쥐여줘선 안된다.

다시 한강공원 얘기로 돌아와서, 그때의 기억이 충격적이었던 건 익사체 사진을 찍고 난 뒤 그들의 행동 때문이었다. 구급차가 시신을 운구해간 뒤 자리로 돌아온 그들은 잡담을 이어갔다. 동창생 근황, 최근 본 영화, 맛있는 식당 얘기 등.

누구도 방금 목격한, 심지어 촬영까지 한 죽음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사고사일까, 자살일까…, 자살이라면 얼마나 희망 없는 세상이기에 이토록 자살자가 많은 걸까 등, 추모하며 나눌 얘기들이 많았을 텐데 말이다. 그게 더 가슴 아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