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전 일이다.
두툼한 외투를 꺼내입기 시작하던 때였다.
문자로 의뢰가 왔다.
곧바로 전화를 걸었지만 상대는 받지 않았다.
의아하게 생각하던 중 다시 ‘문자’가 왔다.
“제가 성대결절 수술을 받아서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문자로 말씀드릴게요.”
당시엔 익숙지 않았던 길고긴 문자 대화가 오갔다.
내가 물었다.
“실례지만 주택 종류, 층수, 평수, 고인과의 관계, 시신이 방치된 기간에 대해서 여쭤봐도 될까요?”
요즘처럼 카톡도 아니라 상대방이 문자를 읽었는지, 내 어투가 실례되는 건 아닌지 이모저모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말투로, 말하는 간격으로, 동정과 호응의 반응으로 감정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전화 통화가 아니다 보니 문자 하나하나에 온 신경이 쓰였다.
답변이 오지 않아 걱정했다. 너무 딱딱하고 사무적이었나?
“얼마나 상심이 크십니까. 죄송합니다만 그래도 현장 정리를 위해선 꼭 필요한 사항이라서,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여쭤봅니다.”
한동안의 침묵이 너무 견디기 어려워 다시 한번 문자를 보냈다.
“괜찮습니다.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답변이 와서 다행이었다. 그런 식으로 드문드문 응답이 오갔다.
문자로 대화가 이어지면서 나는 스스로의 ‘이중성’을 의식하게 됐다.
용건만 묻고 답하는 그 대화에서 감정이 사라져 ‘편해진’ 것이다.
내게 오는 전화는 일상적인 사무가 아니다.
적어도 의뢰인 입장에선 생애 처음 겪는 일. 극도의 감정이 응축된 상태지만, 자신에게 벌어진 사건과는 전혀 상관없는 제3자인 나에게 생전 해본 적 없는 불편한 ‘의뢰’를 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래서 나는 생전 모르는 타인들과의 첫 전화에서 울음·분노·횡설수설·짜증, 짐작하기 힘든 온갖 고통스러운 숨소리와 한숨을 듣는다. 일을 하기도 전부터 그들의 사연이 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를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