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기획 혁신창업의 길] R&D 패러독스 극복하자 〈72〉 루닛 백승욱 의장
미국 실리콘밸리 사람들이 흔히 하는 얘기다. “스탠퍼드 같은 미국 명문대 졸업생 중 가장 뛰어난 사람은 창업에 뛰어들고, 그 다음 졸업생들이 구글·아마존 같은 빅테크 기업에 취직한다.” 이 말을 입증할 만한 통계는 없다. 하지만 세계 경제를 이끌어가는 혁신의 메카, 미국의 단면을 보여주는 인식이다.
고교생은 공부 잘하는 순으로 의대에 진학하고, 대학생은 삼성전자 등 대기업 취직이 최고인 한국 사회에선 꿈나라 같은 얘기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암 진단 인공지능(AI) 솔루션 기업 루닛의 창업자 백승욱(41) 의장은 KAIST를 졸업한 수재이지만, 학부 때부터 창업을 꿈꿨다. 학부 2학년 때 휴학하고, 학과 선배의 스타트업에 들어가 일하다 창업에 눈을 떴다. 글로벌 벤처캐피털 SBVA(옛 소프트뱅크벤처스)를이끌고 있는 이준표(43) 대표가 그 선배다.
KAIST 학부 때부터 창업 꿈꿔
딥테크 습득 위해 대학원 진학
딥러닝 기법 주목하고 AI 창업
글로벌 대기업 뛰어넘는 평가
박사과정 마지막 해였던 2013년 8월 창업한 회사는 성장을 거듭했다. 2022년 코스닥에 상장됐고, 이젠 직원도 350명까지 늘었다. 올 5월엔 뉴질랜드에 본사를 둔 유방암 검진 소프트웨어 플랫폼 스타트업 볼파라의 지분 100%를 2600억원에 인수했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시장에서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전략이다. 볼파라를 합치면 직원 수가 500명에 달한다. 루닛의 지난해 매출은 250억8000만원. 전체 매출의 84.9%를 해외에서 올리는 글로벌 기업이 됐다. 연구·개발(R&D)에 투자하느라 아직 적자 경영이지만, 내년 말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지난 20일 서울 강남역 인근에 자리 잡은 루닛 본사에서 백 의장을 만났다.
학자가 꿈이었지만, 창업에 눈 떠
- 창업자인데, 일찍 최고경영자(CEO) 자리에서 내려왔다.
- “초·중·고와 대학을 모두 국내에서 나오다 보니 해외투자 유치에 어려움이 있었다. AI 기술을 기반으로 회사를 시작했지만, 회사의 성장 과정 중 의료 도메인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단계에서도 한계를 느꼈다. 2018년에 CEO직을 서범석 대표에게 넘겼다. 지금은 이사회 의장이면서 그냥 상임이사로 회사 전반을 챙기고 있다. 그 전엔 제품총괄·혁신총괄 이사 등을 맡기도 했다. ”(서 대표는 KAIST에서 같이 공부했지만, 이후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가정의학 전문의다.)
- 언제 어떻게 창업을 꿈꾸게 됐나.
- “학과 선배의 권유로 학부 2학년 때 휴학하고 선배의 스타트업에 참여했다. 대학 입학할 때까지만 하더라고 물리학 교수가 되는 게 꿈이었는데, 스타트업 경험을 통해 창업의 세계를 새롭게 알게 됐다. 선배 회사에 다니느라 휴학을 4년이나 하는 바람에 2009년에야 학부를 졸업했다. 복학을 한 뒤에는 힙합동아리 구토스에서 만난 5명과 창업을 준비했다. 이들과 같이 대학원에 진학한 것도 진입장벽이 높은 딥테크 창업을 위한 전문지식을 쌓기 위한 과정이었다.”
- 왜 인공지능(AI)으로 창업했나. 2013년이면 AI 붐이 본격적으로 불기 전 아닌가.
- “운이 굉장히 좋았다. 창업 1년 전인 2012년 제프리 힌튼 캐나다 토론토대 교수의 제자팀이 이미지 인식 경연대회에서 탁월한 성적으로 우승해 화제가 됐다. 이 팀의 방법론을 살펴봤는데 그게 ‘딥러닝’(deep learning)이었다. 딥러닝이야말로 그간 우리가 연구해 오던 것들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걸 바로 깨달을 수가 있었다. 결정적으로 운이 좋았던 것은 힌튼 교수 제자팀 중 한 명이 딥러닝의 코드를 오픈소스로 공개했던 거다. 이때부터 딥러닝을 본격적으로 연구했고, 이듬해에 창업하게 됐다.”
(제프리 힌튼 교수는 21세기 AI의 아버지로 불리는 학자다. 그가 개발한 딥러닝 기법은 AI의 학습 능력을 차원이 다르게 높여놨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챗GPT 등 대부분의 AI가 모두 딥러닝 기법을 쓴다.)
“딥러닝 활용한 진단 AI는 우리뿐”
- 창업 첫 아이템은 입을 옷을 추천해주는 패션 AI였는데.
- “대학원에서 공부할 때 구글이 패션 이미지를 분석하는 소프트웨어 회사 라이크 닷컴을 인수했다는 기사를 봤다. 이 정도 수준이라면 우리가 더 잘할 수 있다는 생각에 패션을 창업 아이템으로 정했다. 하지만 패션 AI는 시장의 요구를 충족할 수 없어 사업성이 떨어진다는 걸 알게 됐다. 2015년 암 진단 AI로 비즈니스의 방향을 틀었다. 의료 분야는 AI가 데이터를 통해 분류하고 예측하는 데 강점을 보이는 문제를 많이 포함하고 있어 효과적이라 판단했다. 당시에 외국에도 비슷한 질병 진단 AI가 있었지만, 딥러닝을 활용한 건 우리밖에 없었다. 그만큼 빨랐다.”
- AI는 결국 데이터 싸움 아닌가. 실제 명의보다 암 진단을 더 정확히 할까.
- “AI가 최고 명의와 비교할 때 비슷한 수준의 정확도를 보일 수 있다. 다만, AI가 완전히 명의를 대체할 수는 없다. 그래서 데이터의 양이 중요하다. 루닛은 국내 병원들과 공동연구를 통해 대규모 건강 검진 데이터를 확보, AI 모델을 개발했다. 국내 데이터를 바탕으로 모델을 구축한 후 해외 데이터를 추가해 보완하는 전략을 쓰고 있다.”
- 국내외에 경쟁사가 있을 텐데. 루닛의 위상이 궁금하다.
- “루닛은 글로벌 시장에서 다양한 경쟁사들과 비교 테스트를 거쳤다. GE헬스케어와 같은 글로벌 대기업보다 뛰어나다는 평가를 얻었다. AI를 이용한 영상 진단 분야에서 루닛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자부할 수 있다.”
- 현재 어떤 서비스를 하고 있나.
- “영상 등 진료 데이터를 통해 암 환자를 진단하는 것과 암 치료를 지원하는 두 가지 제품군을 보유하고 있다. 첫째는 유방암 검진을 위한 솔루션이고, 둘째는 암 환자의 치료 과정에서 최신 항암제를 처방받을 수 있도록 돕는 솔루션이다.”
미국처럼 바뀌는 국내 대학 창업 분위기
- 앞으로 회사 비전은.
- “루닛은 AI 기술의 발전 속도에 맞춰 영상 진단뿐만 아니라 더 다양한 의료 분야로 확장을 준비하고 있다. 의료 AI 분야에서 지속적인 성장을 이어갈 것이다. 지난해 창립 10주년 때 ‘2033년까지 매출 10조원, 영업이익 5조원’의 비전을 세운 바 있다.”
- 창업 당시와 지금의 딥테크 창업 생태계를 비교해본다면.
- “2013년 당시엔 국내 대학에서 창업하는 학생들을 보기 힘들었다. 대학과 정부의 지원도 부족했다. 학업을 중단하고 창업하면 국가장학금을 토해내야 했다. 졸업 전에 창업했는데, 이 때문에 다른 공동창업자에게 대표를 대신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대학 내 창업 분위기는 물론, 다양한 지원들이 갖춰져 있다. 캠퍼스 내 창업 분위기가 미국 대학에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
김은경 용인세브란스병원 병원장
“인공지능 기반 영상판독 보조 프로그램이 잘 이용되기 위해서는 판독의 정확도를 높이고 판독 워크플로우가 향상되어야 한다. 루닛의 엑스레이와 유방 촬영술 AI 솔루션은 두 가지 면을 모두 해결했다고 본다. 덕분에 AI가 이상 여부에 대해 판독하면 의료진도 이를 신뢰해 더 나은 진단을 할 수 있게 됐다.”
이준표 SBVA 대표(옛 소프트뱅크벤처스)
“창업 초기부터 함께 하며 그들의 성장을 가까이서 지켜봐 왔다. 루닛은 업계 최대 매출과 최다 연구 성과, 그리고 뛰어난 팀의 다양성을 갖췄다. 한국을 넘어선 글로벌 AI 딥테크 기업의 롤모델로 자리 잡고 있다. 상장 후에도 지속적인 혁신을 이어가고 있고, 향후 10년 내 한국을 대표하는 대기업으로 성장할 것으로 기대된다.”
◆‘혁신창업의 길’에서 소개하는 스타트업은 ‘혁신창업 대한민국(SNK) 포럼’의 추천위원회를 통해 선정합니다. SNK포럼은 중앙일보ㆍ서울대ㆍKAIST를 중심으로, 혁신 딥테크(deep-tech) 창업 생태계 구성원들이 함께 참여하는 단체입니다. 대한민국이 ‘R&D 패러독스’를 극복하고, 퍼스트 무버 국가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연구개발(R&D)에 기반한 기술사업화(창업 또는 기술 이전)가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취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