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보다 정몽준 대통령” 盧 단일화 승부, 자신을 버렸다

  • 카드 발행 일시2024.09.25

성공한 노무현, 실패한 노무현

성공한 노무현, 실패한 노무현를 내 관심에도 추가해드렸어요.

차 돌리세요.

어허 안 된다니까.

가고 싶지 않다니까요. 차 돌리세요.

걱정 마. 정몽준이 절대 안 나올 테니까.

2002년 12월 18일, 선거 전날 밤. 여의도를 출발한 차 안에서 대선후보 노무현과 선거대책위원장 정대철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정몽준이 노무현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직후였다. 차는 어느새 정몽준의 평창동 집에 도착했다. 이미 밤 11시가 넘었지만, 기자들이 대거 진을 치고 있었다.

정몽준은 끝내 얼굴 한 번 내비치지 않았다. “이미 잠자리에 들었다”는 것이 측근의 설명이었다. 이재정 신부가 현장에 찾아왔고, 함께 기도했다. 노무현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여기서 울면 스타일 구겨, 이 사람아.” 정대철 말에 기자들을 의식하고 잠시 옷매무새를 고쳤다. 1시간 가까이 선 채로 기다리다가 발걸음을 돌리는 노무현의 마음은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렇게 노무현이 문전박대당하는 장면은 텔레비전 방송으로 전국에 생중계됐다. 노무현은 낙심천만이었고, 선대위원장 정대철은 도리어 역전의 기회가 마련된 것으로 판단했다는 것이 지금의 회고다.

2002년 12월 19일 밤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과 부인 권양숙 여사. 한화갑 민주당 대표, 정대철 선대위원장과 만세를 하며 당선을 기뻐하고 있다. 중앙포토

2002년 12월 19일 밤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과 부인 권양숙 여사. 한화갑 민주당 대표, 정대철 선대위원장과 만세를 하며 당선을 기뻐하고 있다. 중앙포토

아무튼 대선 막판 최대 변수였던 노무현-정몽준 단일화는 선거운동 마감 1시간 30분을 앞두고 허망하게 깨져버렸다. 노무현 캠프엔 청천벽력이었다. 사실 이회창 1강 구도의 기존 판도가 단일화 성공을 계기로 노무현 쪽으로 눈에 띄게 선회하고 있는 중이었다. 바로 다음 날이 선거일. 투표가 계속되는 중에 하루종일 여기저기서 내기가 벌어졌다. 이회창이냐, 노무현이냐를 놓고 벌어졌던 크고 작은 내기였다. 드디어 개표가 시작됐다. 초반에 앞서 가던 이회창이 저녁 8시가 지나면서 뒤집어지기 시작하더니 결국 노무현의 승리였다. 한 편의 드라마였다.

대선 전날 심야의 단일화 파기 상황을 보도한 중앙일보 지면.

대선 전날 심야의 단일화 파기 상황을 보도한 중앙일보 지면.

🔎목차

1. 폐족(廢族)을 구하다
2. 바보 노무현  
3. 형, 나 대통령 됐어
4. 비주류의 진주(進駐) (10월 2일 발행 예정)
5. 토론 공화국 (10월 16일 발행 예정)

돌이켜보면 노무현은 그저 그런 군소 후보 중 한 명이었다. 직전 15대 대통령 선거(1997년)에서 근소한 차로 김대중에게 무릎을 꿇었던 한나라당의 이회창이 대세였다. 민주당은 이인제가 5년을 준비해 왔다. 따라서 16대 대선의 본선은 이회창과 이인제의 한판 승부라는 것이 일반적인 예상이었다. 청문회 스타로 눈길을 끌긴 했으나 노무현을 대통령감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당내에서도 별로 없었다. 중앙일보 신년 여론조사에서도 이인제(41%)가 노무현(21.6%)을 두 배 가까이 앞섰다.

그러나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아는 법. 노무현은 기죽지 않았다. 2002년 3월, 예선 격인 민주당 경선이 시작된다. 7명의 쟁쟁한 후보들이 나섰다. 이인제·한화갑·김근태·정동영·김중권·유종근, 그리고 노무현.
명색이 대통령 후보를 뽑는 선거 캠프인데, 그는 우선 돈이 없었다. 기탁금 2억5000만원을 만들기도 빠듯했다. 참모들은 머리를 싸맸다.

백원우=“형, 이인제가 엄청 큰 사무실을 구했다는데. 100평이래.”
이광재=“우리도 일단 제일 큰 사무실을 구하자.”
백원우=“임대료는 어쩌고?”
이광재=“노무현이는 안 된다는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해. 일단 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