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부〉 극좌·극우의 희생자 죽산 조봉암
」① 조봉암을 말하기 어려운 이유
」세상은 온통 ‘뻘갱이’와 ‘퍼랭이’로 나뉘고, 걸핏하면 서로에게 굴레를 덧씌우는 세태에 조봉암을 말한다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고, 그래서 마음이 편치 않다. 그의 이념이 옳았든 글렀든, 그가 간첩이었든 아니었든 조봉암은 한국 현대사를 읽는 한 프리즘임에는 틀림이 없다. 문제는 얼마나 객관적으로 쓰느냐의 문제만 남았다.
나는 언제인가 그의 해원(解冤)을 다루고 싶던 차에 이번 연재에서 그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를 다룬다는 것 자체가 좌익으로 몰릴 수 있다는 것을 잘 알지만, 공자(孔子)께서 가르쳐준 대로 “사실을 말할 뿐 꾸민 얘기는 쓰지 않으련다.”(‘술이부작·述而不作’, 『논어』 술이편)
어느 날 연구실에 찾아온 죽산의 딸
죽음이 슬픈 것은 영원히 만날 수 없다는 절망 때문이 아니라 죽어야 할 정당한 이유도 없이, 죽음이 너무 빨리 찾아왔기 때문이다. 누구인들 죽지 않으랴? 우리는 천수를 누린 죽음을 그리 서러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 상례를 호상(好喪)이라 한다. 그러나 수명이 갑년(甲年·60세)을 넘기지 못하고 죽기에는 너무 억울하다. 필부의 죽음도 그렇거늘, 그 앞에 조국을 위해 해야 할 일이 쌓여 있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1980년대 어느 날, 내가 병아리 교수 시절에 한 중년의 여인이 학교 연구실로 찾아왔다. ‘아름다우나 사치하지 않았고,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았으며’(『삼국사기』 온조왕 15년 춘정월: ‘화이불사 검이불루·華而不奢 儉而不陋’) 첫눈에 범속(凡俗)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죽산(竹山) 조봉암 선생의 딸이라고 소개했다. 이제 생각하니 조호정(曺滬晶) 여사였다. 나는 마음속으로 작게 탄식했다. 어찌 오셨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한참 침묵의 시간이 흐른 뒤 조 여사께서 말씀하셨다.
“신 교수께서 제 아버님의 선배이신 최익환(崔益煥) 선생의 사위라는 말도 들었고, 또 한국 현대사를 연구하신다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제 아버님의 복권 문제를 도와주실 수 있을지 해서 찾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