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부〉 한국전쟁의 미스터리
」② 끊이지 않는 미국의 함정설
」한국전쟁 수정주의자들의 논리
(미국이 한국전쟁을 유도했다는) 수정주의자들의 음모설에 기름을 부은 것은 이른바 ‘안보 각서(NSC)-68호’(FRUS: 1950, Vol. I, 1977, 234~312쪽)다. 살아 있는 미국의 최고 지성인 촘스키(Noam Chomsky)는 그의 저서에서 “이 문서는 미국의 현대사에서 치명적인 문서 가운데 하나(On Power and Ideology, 1987, 15쪽)”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 글은 4만3000단어에 이르는 장문인데, 단적으로 말해서 미국 재무장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매파들의 의견서였다. 그 행간에 미국으로서는 지금 어디에서인가 전쟁이 필요한데, 그 가운데 하나가 곧 한국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1950년 4월 14일자로 작성된 이 문서는 대통령 안보실(NSC)의 사무국장 레이(James S. Lay, Jr)의 명의로 작성된 것으로, 그 뒤에 이어진 검토 회의의 회의록을 보면 합동기획참모국(Policy Planning Staff)의 국장이었던 니츠(Paul Nitze)의 입김이 크게 작용한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신복룡(역), ‘안보각서 68호’, 『한국분단보고서』(3), 2023, 329~497쪽에 기록돼 있다.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니츠는 이를 놀라움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유일한 고위정책결정자였다. 그는 소련의 교사를 받은 위성국가 북한이 1950년 여름날에 야음을 타고 침략한다는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제출됐던 1950년 4월의 상황에서는 이런 문건이 있다는 것 자체가 곧 극비였다가, 1977년에야 비밀이 해제됐다.
당시 미국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조직 강화에 몰두해야 했고, 방위비와 해외 군사 공약과 군사력의 삭감 또는 감축을 요구하는 페어 딜(Fair Deal) 경제 체제로 말미암아 제약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극동에서의 안보 정책에 심각한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1948년 미국의 전투 병력은 50만 명으로 감축됐고, 1945년 당시 GNP의 38.5%였던 군사비는 4.5%로 삭감됐다(Joo-Hong Nam, 1986, 29쪽). 대체로 미국 군대의 숫자에는 상한선(ceiling)이 없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절정기에 미군의 총수는 대략 1310만 명 정도였다(Francis T. Miller, 1952, 966쪽).
그러나 1950년 초가 되면 미국의 군대는 사실상 해산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미국의 매파로서는 국면의 전환을 위해 긴장이 필요했다. 이러한 계제에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이를 두고 또 다른 수정주의자인 시몬스(Robert R. Simmons)는 이렇게 지적했다.
“한국전쟁이야말로 워싱턴이 계획을 이미 마련해 놓은 모형[안보 각서 68호]에 매우 부합되며, 미국은 이미 정해진 계획을 수행하기 위한 기회로 한국전쟁을 포착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Without Parallel, 1974, 15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