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에 3만5000인분 밥 짓는 여자…'김연아 밥솥' 이렇게 나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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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영 쿠첸 밥맛 연구소 밥 소믈리에(수석). 쿠첸 제공

이미영 쿠첸 밥맛 연구소 밥 소믈리에(수석). 쿠첸 제공

밥맛부터 물맛까지-.

가전업계가 소비자 입맛 연구에 빠졌다. 전문 연구소를 두고 관련 연구개발(R&D)부터 생산을 직접 주도한다. 소비자 만족도를 높이고 브랜드 경쟁력을 강화하겠다는 전략이다.

‘김연아 밥솥’으로 흥행몰이 중인 쿠첸이 대표적이다. “고객이 사랑하는 최고의 밥맛을 찾겠다”는 목표로 2019년 쿠첸연구개발본부 산하에 밥맛연구소를 출범했다. 일본취반협회 자격증을 취득한 밥 소믈리에 6명과 쌀·밥 관련 전문 지식과 설계 기술을 갖춘 연구원 등 30여명이 소속돼 있다.

쿠첸 로고. 중앙포토

쿠첸 로고. 중앙포토

이들은 매일 국내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혼합미로 밥을 짓고 밥맛을 결정할 취반 온도, 시간, 압력 등 모든 경우의 수를 검토해 최적의 조합을 찾는다. 쿠첸 관계자는 “메뉴별 특징에 따른 최상의 알고리즘을 개발하는 것이 목표”라며 “최상의 밥맛을 구현하기 위해 가열 시간과 단계별 가열 속도, 총 조리시간 등의 조건을 정확하고 세밀하게 설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라고 설명했다.

지난 2016년 가마솥밥·돌솥밥·뚝배기밥을 정확히 재현해 내는 밥솥을 선보인 것도 연구소의 성과였다. 연구원들은 이런 밥의 취사 공정을 구현하기 위해 1년 6개월간 발로 뛰며 전국 맛집을 찾아다녔다. 총 1440회, 12만6000인분의 밥을 지으며 맛있는 밥의 알고리즘을 분석했고 그 결과를 적외선 센서에 반영, 가마솥밥·돌솥밥·뚝배기밥 맛 구현에 성공했다. 최근에는 다양한 간편식이 등장하면서 쌀밥 수요가 줄고 있지만, 건강에 대한 관심이 커지며 잡곡밥 수요는 상대적으로 늘고 있어 최고의 잡곡밥 맛 내기에 몰두해 있다고 한다.

이미영 쿠첸 밥맛연구소 밥 소믈리에(수석)는 “팬데믹 이후 건강 중시 풍조에 따라 혈당·영양 관리 등을 위해 잡곡밥 수요가 증가했다”라며 “다양한 쌀 품종 이외에도 경도, 수분흡수율, 찰기 등 잡곡의 특성에 맞는 최적의 밥맛을 구현하기 위한 알고리즘 개발에 매진하고 있다”라고 했다.

또 “회사가 자체적으로 데이터를 수집, 분석하기 때문에 정밀한 연구가 가능하다”라며 “식감, 영양소 등 다방면에서 밥맛을 높이는 최상의 알고리즘을 개발하는 건 물론 취사 공정을 정확히 실행할 수 있는 제품 설계까지 원활히 진행할 수 있고 이는 결국 브랜드 경쟁력으로 이어진다”라고 했다.

코웨이정수기 로고. 중앙포토

코웨이정수기 로고. 중앙포토

국내 대표 물 기업인 코웨이도 2019년 환경기술연구소 소속 물맛연구소를 업계 최초로 설립한 뒤 깨끗하고 맛있는 물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워터 소믈리에 39명 등 연구원 300여명이 근무한다. 코웨이 관계자는 “물맛을 과학적으로 입증해 신뢰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며 “물맛에 영향을 주는 인자를 도출하고 전문기관과 공동 연구를 통해 물맛을 검증하고 객관적 근거를 확보해 맛있는 물에 대한 기준도 세우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코웨이는 지난해 한국국제소믈리에협회가 주관하는 제7회 정수기·생수 물맛 품평회에서 정수기 부문 최고 등급인 ‘그랑골드’를 획득했다.  정수기 성능을 결정짓는 핵심 부품인 필터를 연구·개발하고 주요 필터는 직접 생산한다.

코웨이의 지난해 연구개발 비용은 약 531억원에 달한다. 환경가전 업계의 통상적인 수준(약 200억원대)보다 많은 편이다. 코웨이 관계자는 “신기술, 신제품이 성장 동력이라고 보기 때문에 연구개발에 계속 투자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이밖에 김치 냉장고 회사는 김치 연구소를, 안마 의자 회사는 관련 메디컬 R&D센터 등 전문 연구소를 두고 신제품 개발을 한다. 연구소가 기업 이미지와 제품 신뢰를 높이는 데 유리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특히 정수기처럼 대기업들도 뛰어드는 시장에서 중견 기업들은 혁신 제품으로 승부를 내려면 연구개발 경쟁력이 필수다.

밥 소믈리에게 듣는 밥맛 연구의 세계

이미영 쿠첸 밥맛 연구소 밥 소믈리에(수석)는 2009년 쿠첸에 입사해 밥맛 연구만 15년째 하고 있는 이 분야 베테랑이다. 이 수석은 2017년 밥 소믈리에 자격증을 처음 접한 뒤 연구소 선임으로서 가장 먼저 도전하게 됐다고 한다. 지난달 21일 그를 전화로 인터뷰했다. 다음은 이 수석과의 일문일답.

하루 일과는. 
출근하면 일단 실험 계획을 세운다. 이후 쌀을 씻고 계량해 취반 준비를 한다. 8대 정도 밥솥에 취사를 한다. 1대당 최대 6회씩 반복해 밥을 짓는다. 적정 값을 찾아 가열량과 작동 시간 등을 제어하고 메뉴별 알고리즘을 개발한다. 1년에 약 5.3t의 쌀을 사용하니, 연간 3만5000인분 정도 밥을 짓는 거다. 상품 기획 회의, 제품 평가 회의 등에도 참여한다. 
매일 밥을 먹으면 질리지 않나.
실험 때 먹는 밥은 주식으로 먹는 것과 다르다. 테스트용 밥은 오감을 이용해 판단하고 분석하는 데 집중하기 때문에 포만감 느낄 만큼 먹지 않는다. 실험 후 남은 밥은 동물 사료로 활용할 수 있게 처리한다. 
이미영 쿠첸 밥맛 연구소 밥 소믈리에(수석). 쿠첸 제공

이미영 쿠첸 밥맛 연구소 밥 소믈리에(수석). 쿠첸 제공

가장 기억에 남는 성과는. 
압력 제어, 온도감지센서, 히터 등 밥솥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모든 경우의 수를 검토, 최적의 조합을 찾아내는 것이 우리 일이다. 쿠첸이 국내 최초로 개발한 2.1초고압을 바탕으로 한 ‘121 밥솥’은 이렇게 탄생했다. 기존 2.0 기압을 2.1로 높인 것인데, 0.1을 높이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단순히 압력을 높이면 되는 게 아니라 이를 견딜 안전장치 등 인프라가 구축돼야 하기 때문이다.  
연구의 최종 목표가 있나. 
밥맛 연구소의 알고리즘 제어 기술력 외에 기구, 회로, 소프트웨어 제어 기술 등이 다 함께 연계돼 하나의 팀으로 업계 최고 수준의 기술과 신뢰성이 확보된 제품을 개발해 나가는 것이다.
햇반 시대 경쟁력은 어디 있다고 보나.
밥맛은 주관적이라 ‘맛있다’는 기준을 정량화해 제시하기 어렵다. 그러나 소비자가 각자의 취향과 입맛에 맞는 밥을 집에서 쉽게 만들 수 있도록 개인 맞춤형 알고리즘 개발을 위해 연구하고 있다. 직접 취사해 먹는 밥이 믿고 먹을 수 있는 안전한 밥이라는 인식도 건재하다. 고물가 상황 속 직접 해 먹는 밥의 경제성도 간과할 수 없는 경쟁력이다. 밥솥으로 직접 만든 밥만이 줄 수 있는 가치도 여전히 있다고 본다.
밥을 맛있게 짓는 비결이 있나.
정교한 취사 알고리즘에 앞서 등급이 좋고 상태가 좋은 쌀을 써야 맛있는 밥을 만들 수 있다. 쌀 분량은 계량컵으로 조절하면 가장 정확하다. 개봉한 지 시간이 좀 지난 쌀은 금방 마르기에 해당 쌀로 밥을 지을 땐 기준 양보다 물을 조금 더 넣는 게 좋다. 반대로 갓  도정한 쌀은 수분 함량이 높기 때문에 평소보다 물을 적게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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