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에 유럽식 ‘숲속 주택단지’
1950년 8월, 나는 대위로 형산강 전투에 배치돼 있었다. 포항 시가지는 폐허였다. 9월에 북진을 시작했을 때, 평생 못 잊을 두 장교를 만났다. 나를 보좌관으로 발탁한 김웅수(5·16에 반대해 미국으로 이민) 대령과 재일동포 학생으로 자원입대한 한 살 밑의 김수용 중위다.
우리가 원산에 닿은 50년 가을, 형산강 하구 모래밭엔 건물이 하나 들어섰다. 전쟁 고아와 무의탁 노인을 돌보는 예수성심시녀회 수녀원이었다. 바로 이곳이 68년 포철이 제철소를 올려야 할 자리였다. 당시 수녀원에는 신부 두 분과 160명의 수녀가 500명 넘는 고아와 노인들을 보살피고 있었다.
나는 성직자들을 만나 “최대의 복지는 절대 빈곤을 벗어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꼭 제철소를 지어야 한다”고 간곡하게 설득했다. 성직자들은 결국 길을 비켜주었고, 불도저가 고아들의 둥지를 밀어냈다. 나는 그때부터 복지 문제를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당장 급한 것이 사원 복지였다.
사원 복지의 핵심은 의식주와 교육일 것이다. ‘의·식’은 급여로 해결하더라도 주택과 교육은 경영자의 철학이 필요한 항목이다. 나는 먼저 사원주택 부지를 매입하기 위해 은행에 돈을 빌리러 다녔다. 아무리 통사정해도 담보가 없으니 은행장마다 퇴짜를 놓았다. 단 한 사람, 한일은행(현 우리은행)의 하진수 행장만 나의 열정을 믿어주었다(이에 대한 보은으로 지금도 포스코는 우리은행을 주거래은행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포철은 공장 말뚝도 박기 전인 68년 11월, 사원주택 부지 20만 평을 매입했다. 그러자 국회에서 난리가 났다. 정치권은 나를 부동산 투기꾼으로 몰아세웠다. 미쳤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