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빈국들에서는 여전히 에이즈·결핵·말라리아 등의 질병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한국은 그런 질병을 퇴치할 수 있는 혁신적인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국가입니다.”
10일 서울 중구 더플라자 호텔에서 만난 글로벌펀드의 피터 샌즈(62) 사무총장은 한국 기업들이 감염병 퇴치에 필요한 기술 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글로벌펀드는 2002년 설립된 국제보건 조달기구로, 각국 정부 및 민간의 기부금으로 재원을 조성해 3대 전염병(에이즈·결핵·말라리아) 퇴치에 사용하고 있다. 코로나19 유행 때는 진단키트, 치료제 등을 조달받아 개발도상국에 지원하기도 했다. 설립 이래 이들 감염병 대응을 위해 지출한 금액만 총 654억 달러(약 87조9000억원)에 달한다.
샌즈 사무총장은 이날 글로벌펀드와 한국 외교부가 공동 주최한 ‘2024 한-글로벌펀드 감염병 대응을 위한 고위급 심포지엄 및 조달포럼’ 참석차 한국을 찾았다. 이번 방한에서는 특히 한국 바이오 기업들과 글로벌펀드 대표단이 ‘일대일’ 면담을 가지며 상호 간 이해를 넓히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는 “이번 포럼을 통해 한국 제약·의료기기 업체들과의 협력을 더 공고히 하고 싶다”며 “한국의 많은 기업이 글로벌펀드와 이미 파트너십을 이루고 있지만, 아직 그렇지 않은 기업들에는 향후 어떻게 협력할 수 있는지, 또 어떤 혁신을 제공할 수 있는지 살펴볼 수 있는 기회”라고 말했다.
한국은 과거 글로벌펀드와 같은 국제 보건기구의 수혜를 받는 입장에서, 이제는 세계에서 14번째로 많은 기부금을 내는 공여국이 됐다. 글로벌펀드는 3년에 한 번 재정 공약 회의를 개최하는데, 지난 2022년 열린 제7차(2023~2025) 회의에서 1억 달러 공여를 약속하면서다. 이는 앞선 제6차 회의 때 기부한 2500만 달러의 4배로, 최대 증가폭이었다.
한국 기업들은 글로벌펀드가 저소득 국가들에 배포하는 의약품·기자재를 3번째로 많이 공급하고 있는 국가이기도 하다. 최근 4년(2020~2023년) 동안 글로벌펀드는 최소 5억800만 달러(약 6829억원)어치의 의약품·기자재를 한국 기업으로부터 구매했다.
샌즈 사무총장은 “한국은 특히 치료법이나 진단 기기 관련해 혁신적인 기술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며 “예컨대 말라리아 대응에 있어 모기 기생충이 기존 치료제에 내성을 갖게 되는 어려움이 있는데, 한국 기업이 차세대 치료제 기술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또 “결핵의 경우 진단이 가장 어려운 부분인데, 한국 기업들이 이 분야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며 “3대 질병 모두에 걸쳐 기업들의 혁신이 커다란 변화를 가져올 기회가 여전히 많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기업들이 글로벌펀드에 참여하는 것이 비용 효율성이 높다는 점을 강조했다. 글로벌펀드가 2008년 도입한 공동조달매커니즘(PPM)에 참여하면 글로벌펀드가 의료기기·의약품이 필요한 국가들과 제조업체 간 가격 협상을 진행해 기업들이 일일이 협상할 필요를 덜어준다. 샌즈 사무총장은 “한국 기업들은 글로벌펀드에 참여하는 것이 효율적으로 혁신을 전파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샌즈 사무총장은 내년에 개최될 제8차 재정 공약 회의에서 한국에 기대하는 기부금 규모에 대해서는 “아직 언급하기 이르다”면서 말을 아꼈다. 그러면서도 2022년 자신이 인터뷰를 통해 한국 정부에 지원 확대를 촉구한 이후 실제 4배 증액이 이뤄진 것에 대해 “한국 정부가 내 인터뷰에 강력한 응답을 내놓은 것에 큰 감명을 받았다”며 감사를 표했다.
그는 “전염병은 국경을 초월한다. 코로나19 때 우리가 겪었고, 한국의 경우 (북한에서 매개 모기가 유입되는) 말라리아 역시 그렇다”며 “한국이 국제 보건 분야에서 리더십을 지속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전체 인류를 위한다는 도덕적 관점뿐 아니라, 감염병으로 인한 위협을 줄이는 자국의 보건안보 측면에서도 이익에도 부합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