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부〉김일성 신화의 진실
」④ 활동 미약했던 남한의 게릴라들
」게릴라전 과신한 박헌영의 오판
남한 출신인 박헌영은 한국전쟁을 추동하면서 김일성보다 더 게릴라전의 효과를 과신하고 있었다. 그는 “남조선의 우리 조직(남로당원)은 800만 명”(해방일보 1946. 5. 15.)이라고 호언장담했다. 이것은 아마도 허장성세였을 것이다. 일단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남한으로 내려가 돌파구를 찾고 싶었던 그의 정치적 욕망과 계산이 빚은 실언이었다.
김일성이 전적으로 그의 말을 믿고 개전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박헌영으로서는 언제인가 이러한 자신의 발언에 책임져야 할 날이 오리라는 것을 계산하지 못했다. 김일성은 중공군의 참전과 함께 1950년 12월에 부수상 겸 외무상(군사위원)인 박헌영에게 중장 계급 부여와 함께 인민군 총정치국장을 겸임토록 했다(강상호, 중앙일보 1993. 3. 8.).
그러나 남한에서 게릴라전의 호응이 있을 것이고, 이를 통해 승리하리라던 김일성의 소망이나 박헌영의 계산은 부질없는 것이었다. 대구 사건과 남로당의 와해, 제주 4·3사태와 여수·순천 사건의 좌절은 그들이 유격전을 통한 승리의 희망을 좌절시켰다. 실제로 1948년부터 1950년까지의 빨치산은 수적으로도 급격히 감소하고 있었다(서주석, 1993, 77쪽).
유성철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남한에서는 가혹한 소탕작전으로 말미암아 남로당 당원 90만 명은 1948년 현재 24만 명으로 감소해 있었다. 이는 그들을 통한 승리의 가능성이 날로 낮아지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게릴라의 성공 가능성이 작을수록 내전이 전면적으로 확대될 가능성은 커진다. 그러나 남한에서 게릴라전은 전술적으로도 불가능한 것이었다.
소수에 의한 테러 위주의 도시 게릴라가 아닌 전투 개념으로서의 유격전을 전개하려면, ① 연륙(連陸)한 퇴로가 있어야 하고, ② 강추위가 없어야 하고, ③ 밀림이나 동굴과 같은 엄폐 수단이 있어야 하며, ④ 생식(生食)으로 식사할 수 있어야 하고, ⑤ 주민의 호의적 동조가 있어야 하며, ⑥ 핵무기와 같은 대형 살상 무기가 등장하지 않은 상황에서 재래식 무기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