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전 모(40) 씨는 30대 후반부터 부쩍 건강에 신경을 쓰고 있다. 발암물질로 알려진 탄 고기와 가공육 섭취를 피하고 유기농·무항생제 식품을 주로 산다. 달리기·테니스 등 운동도 꾸준히 하고 있다. 몸에 나쁜 건 멀리하는 전 씨지만, 거의 매일 밤 와인을 마신다. 그는 "간혹 매일 마셔도 되나 싶을 때가 있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해롭다는 생각은 안 해봤다"면서 "와인 한 잔 정도는 몸에 좋다는 말도 있지 않으냐"고 반문했다.
대다수 한국인은 전 씨처럼 소량의 술은 건강에 나쁘지 않다고 인식한다. ‘약주’라는 말처럼 술이 건강에 도움된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상당하다.
9일 국립암센터에 따르면 지난해 실시한 '대국민 음주 및 흡연 관련 인식도 조사' 결과 담배가 1군 발암물질이라는 사실을 아는 국민은 88.5%였으나, 술이 1군 발암물질이라는 걸 아는 국민은 33.6%에 불과했다. 국민 2명 중 1명꼴(46.9%)로 "한두 잔의 음주는 건강에 영향이 없다"고 밝혔다.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이도 18%에 달했다. 알코올은 석면·카드뮴·비소 등과 같이 '암을 일으키는 근거가 확실한' 1군 발암물질이다.
서홍관 국립암센터 원장은 "과거 소량 음주는 심혈관 질환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도 있었으나 최근 술 한 잔도 건강에 해롭다는 사실이 확인됐다"면서 "세계보건기구(WHO)도 ‘안전한 음주는 없다’고 선언했다"라고 말했다.
음주로 인한 피해는 건강 악화에 그치지 않는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에서 1만3042건의 음주운전 사고가 발생했다. 강력범죄자 중 주취자도 매년 약 20만명 이상이다.
서홍관 원장은 "술로 인한 사회적 손실이 심각한데도 음주를 권하고, 조장하는 분위기가 만연해있다"라며 "특히 청소년·젊은 층을 타깃으로 하는 주류 광고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청소년의 우상인 운동선수나 아이돌이 담배 광고를 한다고 생각해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지난해 국내에서 송출된 주류광고는 69만건에 달한다. 한국건강증진개발원의 대국민 인식 조사 결과에 따르면 '최근 1년 새 주류광고를 본 경험이 있다'는 응답자가 87.4%에 달했다. 음주를 유도하거나 미화하는 등의 내용으로 국민건강증진법을 위반해 시정 경고받은 주류광고는 2021년 1691건, 2022년 2099건, 2023년 3088건으로 해마다 늘고 있다.
대학생 박 모(22) 씨는 "연예인이 시원하게 맥주를 마시는 광고를 보면 '나도 한잔할까' 생각이 든다"라고 말했다. 한국건강증진개발원 관계자는 "청소년 등이 접근하기 쉬운 공공장소나 온라인 사이트에서 주류 광고를 전면 금지하거나 광고 시간대를 제한하는 등의 자율·타율 규제가 필요하다"라며 "음주를 미화하거나, 청소년에게 파급력이 큰 연예인·캐릭터가 등장하는 것도 해외 선진국처럼 금지돼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 정부는 주류 광고에 ‘clean(깨끗한)’이라는 문구 사용을 제한하고 있다. 술맛이 깨끗하다거나, 다른 술에 비해 덜 해롭다는 식으로 쓰지 못하게 한다. 주류협회 자율 규제도 엄격한 편이다. 주류 섭취가 가능한 연령(만 21세)을 고려해 주류 광고를 실을 수 있는 매체는 최소 73.8% 이상의 수용자가 21세 이상 성인이어야 한다. 또 25세 이하 모델의 주류 광고 출연을 엄격하게 제한한다.
캐나다 정부는 미성년자의 롤모델이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나 캐릭터가 음주를 광고하지 못하도록 규제한다. 일본은 맥주 마시는 소리(꿀꺽꿀꺽)를 들려주거나, 술을 넘길 때 식도가 움직이는 모습을 클로즈업하는 광고를 금지하는 업계의 자율규제가 있다. 술병이나 캔에 담뱃갑 같은 경고 그림을 붙여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한국건강증진개발원 관계자는 "담뱃갑에 섬뜩하게 표시된 경고 그림과 달리 주류는 경고 그림이 없다. 과음 경고 문구가 있지만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작게 쓰여 있어서 국민에게 경각심을 주기 어렵다"라며 "해외에선 주류 용기에 경고 문구를 크고 자세하게 쓰거나 경고 그림을 표기해 가시성을 높이고 있다. 국내에서도 도입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