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소송서류 은행에 내야, 별거할 집 전세대출 된다 [요지경 대출정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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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좁아지던 가계대출 문이 다시 살짝 열렸다. “실수요자가 (대출) 제약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이복현 금융감독원장 발언이 나온 지 4일 만이다. 대출자가 실수요자임을 인정받으려면 까다로운 증빙이 필요하다. 이 원장의 목소리에 따라 은행권의 대출 규제는 시시각각 바뀌고 있다. 실수요자 기준 등 금융당국의 일관된 가이드라인(정책 방향)이 없다보니 금융소비자는 물론 은행권도 우왕좌왕하는 모습이다.

‘이복현 말’에…우리銀 1주택 대출 예외 발표

8일 우리은행은 실수요자 보호를 위해 주택담보대출(주담대)과 전세자금대출(전세대출)의 취급 예외 요건을 발표했다. 지난 1일 우리은행은 가계대출 증가세를 억제하라는 금융당국 압박에 “오늘 9일부터 수도권의 주담대와 전세대출은 무주택자에게만 내어주겠다”는 ‘극약 처방’을 발표했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4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KB국민은행 신관에서 열린 '가계대출 실수요자 및 전문가 현장간담회'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뉴스1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4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KB국민은행 신관에서 열린 '가계대출 실수요자 및 전문가 현장간담회'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뉴스1

하지만 지난 4일 이 원장이 “유주택자가 무조건 (대출이) 안 된다고 하는 건 금감원과 공감대가 없었다”고 비판하자, 새로운 규제 시행일(9일) 하루 전에 1주택자에 대한 대출 예외 허용 방안을 내놓은 것이다.

예비부부, 동거 부모가 1주택이라도 대출 허용

우리은행이 이번에 내놓은 가계대출 규제 예외 조항은 크게 9가지다. 우선 가장 문제가 됐던 ▶결혼예정자 ▶상속인에 대해서는 1주택자라도 주담대와 전세대출을 모두 허용하기로 했다.

김영희 디자이너

김영희 디자이너

결혼예정자는 원래대로면 세대원 중의 한 명이라도 집이 있으면 9일부터 대출이 나오지 않을 예정이었다. 예를 들어 집을 보유한 부모와 같은 세대원인 자녀가 결혼을 위해 주담대나 전세대출을 신청해도 대출 취급을 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번에 바뀐 조건에 따라 청첩장이나 예식장 계약서를 제출해 결혼 예정자임을 인정받으면 대출을 받을 수 있다.

갑작스러운 주택 상속으로 1주택자가 된 사례도 주담대와 전세대출을 허용하기로 했다. 다만 대출신청 시점 직전 2년 이내에 상속을 받았다는 상속결정문을 은행에 제출해야 한다.

이혼 1주택자, 전세대출 받으려면 이혼 서류 내야

1주택자가 수도권으로 직장을 옮기거나 자녀 교육 및 질병 치료, 부모 봉양, 이혼 등의 개인 사정이 있는 경우는 전세대출만 허용한다. 분양권·입주권 외에 주택을 보유하지 않는 경우나 부득이하게 행정기관 수용으로 분양권을 취득한 경우도 전세대출을 내어주기로 했다. 다만 이런 경우에도 주담대는 여전히 빌려주지 않는다.

서울 중구 우리은행 본점 모습. 뉴스1

서울 중구 우리은행 본점 모습. 뉴스1

예외조항에 포함돼 전세대출을 신청하더라도 증빙 절차를 거쳐야 한다. 우선 ‘직장 변경’ 사례자는 회사의 인사발령문을, ‘자녀 교육’은 자녀의 재학증명서를 각각 은행에 제출해 인정받아야 한다. ‘질병 치료’는 수도권 병원에서 본인이나 가족이 1년 이상 치료나 요양이 필요하다는 의사 소견서가 있어야 한다. ‘부모 봉양’은 60세 이상 부모가 수도권에 있다는 것을 증빙하는 가족관계증명서나 주민등록등본이 필요하다. 심지어 ‘이혼’의 경우는 이혼 소송 관련 법원 서류를 은행에 제출해야 돈을 빌릴 수 있다.

우리은행은 “예외 요건에 해당하지 않는 다양한 실수요자 사례에 대해서는 주관부서에서 ‘실수요자 심사 전담팀’을 신설하여, 금융소비자의 불편함이 없도록 세심하게 조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런 실수요자 대출 예외 허용 방식은 우리은행에서 먼저 시작했지만 다른 은행으로 확산할 수 있다.

가계대출 책임 銀에 떠민 당국, “현장 혼란만 커”

은행이 금융당국 압박에 일부 실수요자에게 대출 예외를 허용하기로 했지만, 대출 현장은 오히려 더 복잡해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출 실수요자 기준이 은행별로 제각각인 데다, 금융당국 기조에 따라 또 언제 대출이 막히거나 풀릴지 불확실해졌기 때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은행권 관계자는 “금융당국이 가계대출을 억제하면서 실수요자는 보호하라는 것은 마치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한 것과 같다"며 "정확한 실수요자 기준과 가이드라인이 없어 소비자는 물론 은행권 혼란도 커지고 있다"고 짚었다.

금감원의 오락가락 대응으로 현장 혼란이 커지는 가운데, 가계대출 정책을 총괄하는 금융위원회는 ‘뒷짐’만 지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실제 지난 6일 김병환 금융위원장은 “정부의 가계부채 관리 강화 기조는 확고하다”면서도 “차주(대출자) 사정을 가장 잘 아는 은행이 합리적인 방식으로 고객 불편을 잘 해소해 나갈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가계대출을 줄이라는 원칙만 내세운 채 정작 방법과 책임은 은행에 떠민 것이다.

금융당국 신용대출·카드론 제한도 만지작

한편, 금융당국은 가계대출 증가세 막기 위해 추가 규제도 검토 중이다. 대표적으로 신용대출에 소득대비대출비율(LTI)을 적용해 대출 한도를 연 소득으로 묶는 방안이다. KB국민은행 등 일부 은행은 신용대출 한도 축소를 이미 시행하기로 했다. 규제가 약한 제2금융권으로 대출 수요가 번지는 ‘풍선효과’를 막기 위한 '카드론' 한도 축소도 검토 대상이다. 과도한 대출 규제에 자칫 서민들의 '급전' 창구마저 줄줄이 막힐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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